기사제목 21세기는 덕후가 주인공(? )덕후들의 세상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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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덕후가 주인공(? )덕후들의 세상이 왔다

기사입력 2016.01.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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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덕후에 대한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은 케이블채널 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다. 극단적으로 상식을 벗어난 취향을 지닌 사람들을 소개하는 이 프로그램(2010년 1월27일 방영분)에 20대 초반의 일본 애니메이션 덕후 남성이 출연했다. 그는 여성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새겨진 베개를 안고 자거나 해당 캐릭터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 충격을 줬다. 이 프로그램은 ‘덕후’의 존재와 ‘덕후’라는 용어를 대중에게 알렸지만 부정적인 이미지도 남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축적한 아마추어’라는 기존의 덕후 이미지에 ‘사회성이 결핍되고 상식적으로 공감하기 힘든 취향을 지닌 부류’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포개졌다.
지난해 11월부터 방영 중인 MBC 예능프로그램 <능력자들>은 대중의 보편적 취향을 거스르기 힘든 공중파 방송이 덕후들을 호출한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지선 PD는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능력자들>은 방송을 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덕후가 ‘루저’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와 혼동되기도 했는데 프로그램을 기획할 무렵에는 ‘워너비’(되고 싶은 사람) 같은 이미지가 생겼다”며 “스펙 쌓기에 골몰하는 시대에 덕후들이 조건 없는 열정을 발휘하는 모습이 대중에게 긍정적으로 비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 이시영, 심형탁, 가수 데프콘 등 연예인들도 방송에서 자신의 덕후 성향을 공개적으로 노출해 이미지 변화에 도움을 받았다. 곽형준씨는 “유명한 사람들 중에도 덕후들이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덕후라는 존재가 대중화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한때 ‘진성 덕후’였다는 이종훈씨(41)는 5년 전쯤 이전 직장에서 한 여성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거절당했다. “덕후는 싫다”는 게 이유였다. 최근에는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이씨는 지난해 <병맛책수다>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는 “한 여성이 ‘젊었을 때 덕질을 못한 게 후회된다’는 댓글을 달아놓은 걸 보고 ‘젊을 때 뭔가에 몰두하는 것은 그 자체로 특권일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며 “시대가 변하면서 덕후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초등학교 시절인 1980년대 만화와 플라스틱 모델 조립에 빠지면서 덕후 생활을 시작했다. 열정의 대상은 5~10년 주기로 변했다. 다만 만화책, 비디오, 플라스틱 모델, 라면 봉지, 미니디스크(MD) 등 일반인이 보기에 “돈 안되고, 쓸모없어 보이는” 대상이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돌멩이를 모으고 있다. 한 웹툰 업체에서 일하는 그는 여기저기서 수집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돌멩이를 배열해 짧은 어구나 문장을 만든 뒤 사진으로 찍어 보관한다. 돌멩이 작품 하나를 만드는 데 보통 하루가 걸린다. 독특한 책방으로 알려진 서울 은평구 ‘이상한나라의헌책방’ 상호 디자인도 그가 만든 것이다.

이씨는 덕후의 기본 요건으로 ‘자료수집의 집요함’을 꼽았다. 2000년대 초반 그는 한 라디오 방송의 재즈프로그램을 미니디스크로 녹음했다. 방송 시간인 일요일 저녁에는 약속도 잡지 않았다. 그렇게 모은 미니디스크 400개를 4개월에 걸쳐 디지털 음성파일로 옮겼다. 서태지 리믹스 음반을 구하기 위해 6개월이 걸린 적도 있다. 그는 “덕후들 사이에선 ‘자료를 구하기 위해선 악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덕후 기질은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인 10대부터 20대 초반에 형성된다. ‘덕질’의 1차적 대상인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에 빠져들기 쉬운 시기이면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이 상대적으로 낮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철덕’(철도 덕후) 박흥수씨(50)는 이례적으로 20대 후반 기관사 일을 시작한 후에 본격적인 덕후 생활에 접어들었다. 직업에 치여 덕후 생활을 하기 힘든 일반적인 덕후들에 비해 그는 직업이 곧 덕후 생활이 되는 ‘덕업일치’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는 “1980년대 학생운동이 퇴조한 후 갈 곳을 찾지 못했던 열정의 대상을 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덕후 생활의 부수적 장점은 같은 대상을 더 깊고 다양하게 이해하는 ‘발견의 즐거움’이다. 예컨대 2013년 한국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보자.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철도역을 설계하는 사람인데, 소설에서는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지 드러나지 않는다. ‘철덕’인 박씨는 주인공이 회사 건물 밖을 내다보는 소설 속 묘사만으로 그 회사가 JR동일본이라는 점을 간파하고 대단한 쾌감을 느꼈다. 출장과 개인 휴가 등을 이용해 시간 날 때마다 일본과 유럽의 철도를 두루 살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덕후 생활에는 시간과 비용이 든다. 즐거움 이외에는 별다른 물질적 보상이나 실질적 대가가 없는 일에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미친 짓’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장난감 같은 대상에 대한 몰입은 ‘유아적 취향’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박흥수씨는 “한국 사회는 쓸모 있는 일, 진지한 일에만 관심을 갖지만, 그 쓸모나 진지함은 1㎝만 파보면 바닥이 드러나는 얄팍한 것”이라며 “덕후들은 쓸데없이 경쟁적이고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한 분야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사람들이다. 최근에 덕후가 각광받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그런 에너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원에서 한국근대문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마친 ‘철덕’ 장병극씨(33)는 최근 덕후 문화가 주목받는 배경을 ‘획일적 전망이 불가능해진 시대에서 자아를 찾는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 한국 사회에는 ‘10대 수능준비’ ‘20대 취업’ ‘30대 결혼과 출산’ 등 특정 연령대에 맞는 생활방식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온존하고 있다. 반면 ‘헬조선’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하리라는 긍정적 전망은 차갑게 응고됐다. 장씨는 “청년들은 가망 없는 ‘헬조선’에 절망하고 은퇴한 세대 역시 전망 없는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에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깊이 추구하는 사람’…일본선 90년대부터 연구 대상

일본은 오타쿠들의 천국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오타쿠라는 말은 한동안 차별의 언어였다. 1989년 일본 전역을 뒤흔든 유아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범인의 방에서 6000개에 이르는 비디오, 만화, 잡지 등이 나온 점을 근거로 이 사건을 ‘오타쿠에 의한 범죄’로 규정했다. 공영방송 NHK는 1997년까지도 ‘오타쿠’ 용어를 방송 금지했다.

오타쿠에 대한 일본인들의 부정적 이미지는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산업이 세계 시장을 석권하면서 희석됐다. 1995년 도쿄대는 오타쿠학을 개설했다. 문화이론가 아즈마 히로키는 2001년 오타쿠를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론적 프레임으로 분석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내놓으며 오타쿠를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끌어올렸다. 2005년 노무라연구소는 만화·애니메이션·철도 등 12개 분야 오타쿠가 약 172만명이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 규모가 연간 4110억엔(당시 기준으로 약 3조7000억원)에 이른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한국의 경우 덕후는 제도권 학문에서는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일본 문화 연구자들과 만화·애니메이션 분야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수준이었다. 최근에는 덕후를 열쇳말 삼아 한국 소비자본주의를 이해하려는 인문학적 시도가 대학 밖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문학협동조합이 2013년 10월 열었던 연속강좌 ‘오덕인문학’이 대표적이다. 강좌를 기획했던 임태훈 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기획위원장은 “덕후들은 권위에 기대지 않고 제도적 인정 없이도 자신만의 깊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1970년 전후 출생해 1980년대에 10대를 보낸 덕후 1세대, 1990년대에 10대를 보낸 덕후 2세대가 현재 소비와 생산의 주축인 30·40대에 진입한 만큼 덕후 문화에 대한 관심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점에서 최근 종영한 <응답하라 1988>에서 ‘7수생’ 정봉이 우표와 레코드를 수집하고 오락실 게임에 탐닉하는 등 덕후 캐릭터로 등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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