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무애행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긴 경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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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행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긴 경허스님

기사입력 2013.10.19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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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애행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긴 경허스님

'무애행'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긴 경허 스님

추위와 바람을 막기 위해 화엄경을 뜯어 문을 바르고 벽을 도배했다거나, 무거운 짐을 지고 투덜거리는 제자에게 축지법을 알려주기 위해 아낙네의 젖가슴을 만졌다거나, 한 평도 채 안 되는 선방에서 모기며 빈대, 구렁이가 몸을 휘감고 지나가도 상관치 않고 참선에 몰두하여 득도를 했고, 어머니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옷을 훌러덩 벗어버리는 파격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경허 스님. 파계승처럼 고기를 먹어가며 술병을 옆에 끼고 거침없는 무애행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긴 경허 스님. 재물 욕심 없이 누더기 옷 한 벌로 저잣거리의 민중들 사이에서 청빈한 삶을 살다간 한국 선문(禪門)의 달마라 일컬어지는 경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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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한국선문의 달마라 불리우기도 하는 경허스님의 영정

 


조선 중기 휴정 스님 이래 가장 탁월한 승려로 평가되고 있는 경허(鏡虛) 스님은 1846년(헌종 19년)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송두옥,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동욱. 일찍이 부친을 잃은 9세의 동욱은 의왕시 청계사에서 계허선사를 은사로 출가했습니다. 이 무렵의 초기 수행은 '항상 나무하고 물을 길어 부처님과 스승 섬기기에 글을 읽을 겨를도 없었다'고 전합니다.

1860년(15세) 무렵에는 계룡산 동학사 강원에 들어가 23세까지 대강백이었던 만화보선에게 불교 경전을 배웁니다.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유명한 학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도가사상과 유가를 공부합니다. 그 결과 23세(1868년)부터 34세(1879년)에 이르기까지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만해 한용운은 이 무렵의 경허 스님에 대해 "공부를 하는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해도 남보다 앞섰으며 내외전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팔도에 이름을 떨쳤다"고 <경허약보>에 적고 있습니다.


경허 스님은 주정뱅이 중노릇만 했을까요?

동학사 산중의 대중들이 한자리에 모인 법회가 열릴 때였습니다. 경허 스님도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동학사의 강사스님이 먼저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나무는 삐뚤어지지 않고 곧아야 쓸모가 있고 그릇도 찌그러지지 않아야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사람도 마음이 불량하지 않고 착하며 정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강사스님의 바른 말씀에 숨을 죽였습니다. 이번에는 경허 스님의 법문 차례가 되었습니다.

"지금 본사 강사스님은 '반듯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삐뚤어진 나무는 삐뚤어진 대로 곧고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반듯하며 불량하고 성실하지 못한 인간은 나름대로 착하고 성실하며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경허 스님을 막힘이 없는 선(禪)의 달인이라고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계율을 깨고 술과 담배, 고기조차 가리지 않고 먹어가며 기행을 일삼은 이단자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불교를 중흥시킨 대선사라기보다는 불교계에 악영향을 주었던 삿된 스님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계율을 어겨 주색과 고기 먹기를 꺼리지 않는 후대의 일부 스님들에게 좋지 않는 영향을 줬다는 것이지요.

경허 스님은 그 재능과 함께 천성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겉으로 구차스런 꾸밈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암 스님은 다음과 같이 경허 스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간의 이익과 손해, 애증, 헐뜯음과 찬양, 고통과 즐거움을 모두 초월하시어 큰 산과 같이 부동하시었다. 가고 싶으시면 가고 머물고 싶으시면 머무시어 타인의 눈치를 보아 우회하는 일이 없으신 분이었다. 이러한 탓에 먹고 마심을 자유롭게 하고 노래와 춤을 맘대로 하는 등 거침없이 행동함으로써 남의 의심과 비방을 사게 되었다…."

경허 스님 자신 또한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술도 때론 빛을 내고 색(色) 또한 마찬가지/탐내고 성내고 번뇌는 영원한 것/부처든 중생이든 그런 것 나는 몰라/일생에 한 일이란 주정뱅이 중노릇 뿐."

경허 스님은 과연 자신의 말대로 '주정뱅이 중노릇'만 했을까요? 해인사 시절 경허 스님은 사하촌의 주막에 들러 술을 잔뜩 들이키고 비틀대며 절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취한 상태로 대적광전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밤, 젊은 스님들은 경허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대적광전에 숨어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대적광전의 부처님 앞에 선 경허 스님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뽑아 들고 자신의 턱밑에 세워 약간이라도 비틀거린다면 칼날이 턱을 뚫고 들어갈 판이었습니다. 그렇게 술 취한 상태로 칼날을 턱밑에 세운 채 곳곳하게 밤을 새웠다고 합니다.

또 다른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경허 스님이 해인사 조실로 있을 때 한 여인을 조실 방으로 들여 숙식을 같이 했다고 합니다. 제자인 만공 스님은 몰래 조실 방을 엿보았는데 이 여인이 나병 환자였던 것입니다. 만공스님은 이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지 않고 문밖에서 지키고 있다가 누군가 경허 스님을 친견하러 오면 "조실 스님께서 주무십니다"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경허 스님은 이 여인에게 밥을 먹여주고 피고름을 닦아 줬다고 합니다. 훗날 만공 스님은 "다른 모든 것은 스승 경허 스님을 흉내 낼 수 있으나 그 같은 일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스님들의 큰 어른이신 조실 스님이 여인네를 방으로 들여 동침한 것은 엄한 계율을 어긴 것입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의 기행을 흉내 내며 계율을 어기고 고기와 주색에 빠져 있는 스님들은 과연 나병 환자와 동침할 수 있는 소름 돋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천장암에는 절벽 위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탐욕스런 중생을 단적으로 표현해 놓은 한 폭의 벽화가 있습니다. 절벽 위에서는 성난 코끼리가 쫒아오고 그 아래에는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있는데 쥐들이 갉아 먹고 있는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벌집에서 흘러나오는 꿀을 받아먹겠다고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경허 스님의 기행만 흉내 내가며 신도들의 주머니 털어 주색에 빠져 있는 어리석고도 탐욕스런 스님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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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장암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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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이 감춰 놓은 암자, 천장암을 지키고 있는 허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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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파른 돌계단을 밟고 천장암 올라 고목정에 서면 멀리 서해안이 보이고 그 해안선 안쪽으로는 천수만 간척지에 가로막힌 간월호가 보인다.

 


'하늘이 감춰 놓은 작은 암자', 천장암과 경허스님의 자제들

연암산(제비바위 산) 자락, 우거진 송림 사이에 자리 잡은 천장암(天藏庵). 천장암은 눈앞으로 비산비야의 물결을 펼쳐놓고 고요히 앉아 있는 작은 암자입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들녘 너머 저 멀리로 서해안이 보이고 그 해안선 안쪽으로는 천수만 간척지에 가로막힌 간월호가 보입니다.

경허 스님은 자암거사에게 보내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천장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천장암이 좋다 함은 한쪽은 산이요 한쪽은 바다라. 하지만 이곳은 경치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만 올 수 없는 곳이 아니라 통인달사(通人達士)들도 오고 갈 수 없다. 통인달사들만이 오고 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부처와 조사들도 그러하다. 이곳을 어찌 가히 말할 수 있으랴"

천장암은 이름 그대로 풀이하자면 '하늘이 감춰놓은 암자'입니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암자, 천장암은 경허 스님이 전국 팔도를 떠돌아다니며 그 중간 중간 18년을 머문 곳이라 합니다.

팔도에 이름 떨쳐가며 동학사 강단에서 강사생활을 하던 경허 스님에게 삶의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1879년(34세) 환속한 옛 스승 계허를 만나기 위해 여행 중에 천안 근처의 한 마을에서 창궐한 콜레라를 만나고 부터였습니다.

사람들이 맥없이 죽어나가는 비참한 현장을 목격한 경허 스님은 그 충격에 휩싸여 동학사로 돌아오는 길에 '이 생애가 다하도록 차라리 바보가 되어 지낼지언정 문자에 매이지 않고 조사의 도를 닦아 삼계를 벗어나리라'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강의를 폐지하고 학인들을 모두 해산시킨 뒤 참선을 시작해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1881년 연암산 천장암에 머물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더욱 굳게 다지는 보림(保任. 불교에서는 '보임'을 '보림'으로 읽고 있다. 보림은 깨달음을 이룬 후 그 깨달음을 견고하게 하는 과정)을 행합니다. 경허 스님의 보림은 필사적이었던 동학사에서의 참선보다 더 극심한 고행으로 이어집니다.

천장암에는 아직도 경허 스님이 극심한 고행을 했다는 한 평도 채 안 되는 작은 방이 남아 있습니다. <경허집>에 보면 그 보림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천장암에 주석하실 때 누더기 한 벌 옷으로 추운 겨울이나 찌는 듯한 여름에도 한 번도 갈아입지 않으시고 모기와 빈대가 몸을 물어뜯고 이들이 옷에 가득하여 온몸이 헐어서 벗겨져도 고요하고 의연한 자세를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벽을 뚫고 들어와 어깨와 등에 올라가 서리고 있는 것을 함께 있는 사람들이 일러 주어도 태연한 마음으로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구렁이가 스스로 기어나갔다. 도에 의정이 깊이 익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한번 앉아 여러 해를 지냈지만 찰나와 같이 보내셨다."

한 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천장암 선방에서 보림 과정을 마친 경허 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부릅니다.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 몰록 삼천 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 들사람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그렇게 경허 스님이 득도를 한 후 보림 과정을 거쳐 설법한 곳이 천장암이었고 당대 선림의 우뚝한 봉우리였던 수월(水月), 혜월(慧月), 월면(月面, 만공)을 제자로 삼아 가르친 곳도 천장암이었습니다. 조계종에 큰 영향을 미친 이 세 명의 제자들을 흔히들 세 달(月)이라고 부릅니다. 수월은 북녘 하늘(만주 지방)에 뜬 상현달이 되고, 혜월은 남녘 하늘(영남 지방)에 뜬 하현달, 만공은 그 가운데(호서 지방) 뜬 보름달이 됐다고 합니다.

일제의 식민불교정책 강행에 항거하며 한국 전통불교의 고수투쟁(1941년 선학원에서 조선고승대회)을 주도했던 만공월면 스님은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선문의 거대한 산맥을 이룬 덕숭산문의 실질적인 지도자입니다.

평생 소를 치고 밭을 갈며 나라를 잃고 북간도에 정착한 우리 민중에게 짚신을 삼아주고 주먹밥을 해먹였던 수월 스님은 호랑이가 애완동물처럼 따르고 찧고 있던 방아공이가 허공에 떠 있는 등의 많은 이적을 보여주었다는 근대의 고승입니다.

영남지방에서 선풍을 일으켰던 해월 스님은 가는 절마다 개간 사업을 벌여 노동을 중시했고 산새들이 날아와서 몸에 앉을 정도로 자비심이 깊었다고 합니다. 1937년 당시 땔감으로 쓰이던 솔방울 가득한 자루를 메고 선 채 그대로 열반한 근세의 도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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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허스님은 천장암에서 당대 선림의 우뚝한 봉우리였던 수월(水月), 혜월(慧月), 월면(月面, 만공) 제자로 삼아 가르쳤다. 천장암 주변에는 해월스님이 수행했다는 바위 굴이 있다.

 


이 무렵 천장암에서 지내던 경허 스님은 주로 충청 경상 일대의 사찰을 돌며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가라앉아 있던 불교에 선풍(禪風)을 일으킵니다. 그러면서 한동안 을 가야산 해인사에서 보내게 되고 58세가 되던 1903년 다시 천장암으로 돌아옵니다. 그 해 가을, 젊은 날의 수행처 였던 천장암으로 돌아오면서 경허 스님은 당시의 심경을 시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아서 세상의 액난을 만나니/어느 곳에 몸을 숨길지 알 수 없구나/어촌과 술집엔들 숨을 곳이 없으랴마는/다만 헛된 이름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두렵도다.

누더기 옷에 지팡이 하나로 삼수갑산으로 떠난 경허스님

1906년 경허 스님은 승려로서 명성이 가장 돋보일 61세 나이에 다시 길을 나섭니다. "옷이 헤어지면 누덕누덕 기워 입고 양식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얻어 먹세"라며 평생 재물을 멀리하여 한곳에 머물러 본 일이 없는 스님은 누더기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새털처럼 가볍게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오지 북방고원으로 떠납니다.

스님이 찾아 든 곳은 유배지로서도 유명한 한반도 최고의 오지 삼수갑산. 거기서 스님은 머리를 기르고 박 난주라는 이름으로 서당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냅니다. 훗날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김탁 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가며 대선사로서의 명성을 세간의 풍진 속에 묻어 버립니다.

"주모와 장사꾼들 틈에 섞여 지내니/자취를 감추기엔 이것이 제격/저물기도 전에 산에서 날쌘 표범 내려오고/깊어가는 가을 찬바람에 기러기 떼 북쪽에서 날아오네/금과 옥을 탐내지 않음은 인간의 보배이니/구름과 안개 속에서 물질 밖의 청한(淸閑)함도 잊었네/초탈하여 의심 없는 마음을 스스로 얻은 것은/다만 지난날 조사(祖師)의 현관(玄關)을 타파했기 때문이네"

<경허집>에는 북방고원에서 입적하기 전까지 남긴 시가 90여 편, 이 시편 속에 경허 스님과 교류했던 26명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습니다. 하지만 경허 스님의 시에는 술과 벗들만 담고 있지 않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황린리 가는 길 왜 이리 슬픈가/도탄에 빠진 생령들 지금도 같은 모습/풀어진 머리 베 짜는 처마 밑에 서린 서리 같고/밥 짓는 손 갈라지고 나무와 낫은 이리저리/어느 부모가 병역 걱정하지 않으며/밭과 논이 있다 해도 벼슬아치들 토색질에 못 견디네/천일주를 구하기 힘든 것 잊으려 해도/가만히 일어나는 생각을 금할 길 없네"

평소 경허 스님은 누가 큰 도시로 나가 교화하기를 권하면 "나에게 서원(誓願)이 있는데 경성(서울)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스님이 향한 곳은 언제나 낮은 곳, 민중들의 웃음과 울음이 있는 저잣거리였던 것입니다.

세수 67세. 법랍 59세. 1912년 4월 25일. 경허 스님은 함경남도 갑산군 웅이방도 하동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입적하기 전 날, 아이들이 서당 마당의 풀을 뽑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고 합니다.

"아 참 피곤하구나."

다음날 새벽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게송을 남깁니다.

"외로이 홀로 밝은 마음의 달/온 누리의 빛을 머금었구나/그 달빛 온 누리와 함께 사라졌으니/O 이는 다시 뭘꼬?"

스님이 입적한 그 다음해 혜월과 만공이 스승의 시신을 운구하여 다비에 모셨는데 당시 스님의 저고리 속에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삼수갑산 깊은 골에/속인도 아니요 중도 아닌 송경허라/천리 고향 인편이 없어/세상 떠난 슬픈 소식은 흰 구름에 부치노라"

경허 스님은 구름에 언듯 언듯 가려져 있는 큰 산입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산의 모습을 전부로 알게 되면 그 큰 산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겠지요. 이렇듯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그 큰 산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겠지만 이 두 편의 시는 경허 스님의 일생이 잘 담겨져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 게송이 선을 통달한 대선사의 면모를 그대로 반영했다면 두 번째 게송은 누더기옷 한벌로 저잣거리를 떠돌아다니며 고통 받는 민중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래하다가 쓸쓸이 세상 떠난 시인 송경허 였습니다. 이 두 편의 게송에서 볼 수 있듯이 경허 스님에게 있어서 부처와 중생은 한 몸이었습니다. 부처가 중생이고 중생이 바로 부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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