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카멜레온 최태민의 사이비종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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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레온 최태민의 사이비종교 이력

기사입력 2016.11.29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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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과 신문 등이 앞다투어 최태민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 가운데 지난주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총회장 여성삼 목사)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는 최태민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한 '영세교 교주인 최태민의 사이비종교 행태'(이하 보고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2793개 산하 교회에 배포했다.

보고서는 최태민의 출생과 사회활동, 영세교의 출발, 대한구국선교단 조직, 사회복지 재단을 통한 비리, 최태민에 대한 평가, 현 시국에 대한 제언 등으로 구성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목사'로 불려온 최태민은 젊은 시절 승려를 지내기도 하고 천주교 세례를 받고, '영세교'를 창시해 사이비교주가 되는 등 카멜레온처럼 변신했고 '신분 세탁'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이름을 6차례나 바꾸었다. 그리고 영부인인 육영수와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후 등 박근혜 대통령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최태민이 함께 있었다.

◇독립운동가 아들에서 사이비종교 교주까지

최태민은 1912년 5월 5일 ‘최도원’(崔道源)이란 아명으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에서 태어났다. 특기할 만한 점은 그의 부친 최윤성 씨가 독립운동가였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가정조선 1990년 9월호를 인용해 최태민의 부친이 "고향에서 독립선언서 1000장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자 피신했고, 1920년에는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고 했다.

최태민의 어린시절과 젊은 시절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보고서는 해방 이후 그가 월남해 ‘최상훈’(崔尙勳)이란 이름으로 강원도, 대전, 인천 등에서 경찰로 일했다고 전한다. 그의 이름은 불과 몇년 만에 다시 한번 바뀐다. 1951년 3월, 6·25전쟁의 소용돌이 중에 그는 ‘최봉수’(崔峰壽)라는 이름으로 부산에서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산'의 부사장을 지냈다.

보고서는 "1954년, 그가 42세 때 스무 살이나 더 많은 김모 씨와 결혼했다가 그녀에게 여자문제로 고소당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법명인 ‘퇴운’이란 이름을 사용했다"고 쓰고 있다.

그후 운영이 어려운 한 중학교의 교장이 되었다가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1963년 민주공화당 중앙위원이 되기도 하는 등 그의 변신을 끝이 없었다. 1965년에는 천일창고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에 입건되자 다시 도피하였다.

보고서는 "1969년 그는 도피 중에도 철저히 신분을 속이면서 ‘공해남’(孔亥南)이란 가명으로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이후 계시를 받았다며 ‘방민’(房敏)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밝혔다. '도원'에서 '방민'까지 총 다섯 차례 이름을 갈아치우면서 경찰, 기업가, 승려, 교장 등 다양한 직업으로 변신한 것이다.

불교와 천주교를 기웃거린 그는 1973년 ‘영세교’(靈世敎)를 창설하고 스스로를 ‘원자경’이라 부르며 사이비종교 교주로 나선다. 그는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고 선전했고 자신을 '칙사' 혹은 '태자마마'라고 불렀다. 그후 수년간 그는 자신을 '조물주의 사자'로 신격화하고 ‘단군’ 혹은 ‘미륵’이라 부르며 신도들을 이끌었다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연결하면 ‘미륵'(미르+k)이 된다"며 최순실 등이 만든 이들 재단의 이름의 유래를 최태민의 별칭에서 찾았다.

◇'영적인 부부'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

보고서는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과의 만남이 육영수 여사 피살 후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1975년 2월 최태민은 심적 혼란을 겪던 박근혜에게 3통의 편지를 보내 위로했는데, 그 편지에는 “육영수 여사가 나타나 근혜를 도와주라”고 했다는 '현몽'(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남)과 육영수 여사가 자신에게 빙의되었다는 주장까지 담겼다.

김형욱 회고록에 따르면 그의 편지는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걸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최태민)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로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는 밀착되게 되었고 후일 최태민은 박근혜와의 관계를 ‘영적인 부부’라고 설명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사이비 교주에서 '구국과 멸공'의 목사로

1975년 4월, 최태민은 영세교의 간판을 내리고 목사로 변신한다. 신학교육이나 목회의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그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의 조모 목사라는 사람에게 10만원을 주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보고서는 또 월간중앙 1993년 11월호를 인용하면서 "그후 불과 며칠 만에 최태민이 전국적 조직인 ‘대한구국선교단’(1976년 구국봉사단, 1979년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을 창설했고 이때부터 그는 일곱번째 이름인‘최태민’(崔太敏)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곧바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묵인 아래 ‘대한구국선교단’ 총재가 되었다. 월간조선에 따르면 1975년 5월 최태민은 임진강에서 2000명의 기독교인들을 동원하여 ‘구국기도회’를 개최했고, 그 자리에서 즉석 제안하여 박근혜를 명예총재로 추대하였다. 이 모임은 일반 기도회가 아니라 ‘반공과 안보’를 전면에 내세운 궐기대회 성격이었다.

1975년 6월에는 공무원과 기독교 목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배재고등학교에서‘구국과 멸공’을 기치삼은 ‘대한구국십자군 창군식’을 거행하고 군사훈련까지 실시했다.

최태민은 기업인을 운영위원으로 위촉해 이들로부터 1인당 2000만~5000만원의 입단 찬조비나 월 200만원의 운영비를 받는 식으로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이 단체는 행정기관의 도움을 받아 전국 동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하여 총 300만 명의 단원을 확보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권력형 비리와 여성 스캔들 잇따라 불거져

하지만 최태민과 관련하여 지속해서 각종 이권개입, 횡령, 사기, 융자알선 등의 권력형 비리와 여러 여성들과의 스캔들 의혹이 터져 나왔다. 중앙정보부는 이에 최태민에 대해 수사하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신동아 2007년 6월호는 "당시 수사자료에는 비리혐의 44건에 3억 1700만원, 여성 스캔들이 12건이나 보고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최태민은 가정조선 1990년 10월호 인터뷰를 통해 그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월간조선 2005년 11월호는 "1977년 9월 각종 비리와 스캔들에 대한 고발이 빗발치자 박정희 대통령이 특명을 내려 최태민을 구속하는 대신, “첫째로 최태민을 거세할 것, 둘째로 청와대 주변을 얼씬 거리지 말게 할 것, 셋째로 (구국여성봉사단만 남기고) 구국봉사단 관련단체는 모두 해체할 것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때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최태민을 잠시 강원도에 피신시키고 자숙할 기회를 주었지만 1978년 2월 구국봉사단은 새마음봉사단으로 개편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총재를, 최태민은 명예총재를 맡는다.

그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하고 18년에 걸친 정권은 하루아침에 바뀐다. 실의에 빠진 박근혜 대통령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것은 최태민. 보고서는 신동아 2007년 6월호를 인용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하자 가장 먼저 박근혜를 찾은 사람이 최태민이라고 알려졌다"고 밝혔다. 이어 "이때 박근혜는 부친의 측근들에 대한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알려진다"고 덧붙였다.

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박근혜 대통령은 대외 활동을 재개한다. 박근혜는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꾸린다. 그후 1990년 '육영재단'을 둘러싸고 근령·지만 등 형제들과 분쟁이 일었을 때 최태민과 최순실 등이 재단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전횡을 일삼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1994년 5월 1일, 82세의 최태민은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만성신부전증의 치료를 위해 장기 입원하였다가 자택에 돌아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박근혜 대통령 "의혹은 많으나 실체는 없다" 주장

일반인들은 거의 잊힌 존재였던 최태민의 이름은 십여 년 후 다시 불거진다. 당내에서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박대통령은 후보 검증과정에서 최태민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의혹에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최태민의 부정 축재 등을 부인한다.

앞서 박대통령은 1990년 11월 동생 근령씨에게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넘기면서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의혹을 일축한 바 있었다.

2007년 박근혜 대통령 역시 최태민에 대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한다. 각종 의혹에 대해선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실체가 없었다. 한가지라도 사실이었다면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나”라며 일축한다.

하지만 위키리크스에 따르면 2007년 7월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전문에 “카리스마 넘치는 최태민 목사는 인격 형성기에 있던 박근혜 후보의 심신을 완전히 지배했다”고 기록했다. 또한 당시 윌리엄 스탠턴 주한 미 부대사도 최태민을 ‘한국의 라스푸틴’이라고 표현하는 등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에 대한 해외 인사들조차 의혹의 눈길을 던졌다.

그리고 2016년 가을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같은 최순실 게이트의 뚜껑이 열렸다.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국민을 참담함 속에 빠트린 이 사건의 뿌리는 40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최 씨 일가의 전횡을 막을 기회가 몇차례 있었음에도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고 최태민은 죽을 때까지 구속 한 번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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