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아이작 뉴턴도 주식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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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도 주식에는 실패했다

기사입력 2016.10.06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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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동양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아마도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일 것이다. 이 시기 서양은 자본집약적인 농업경영을 시작했고 광공업 분야의 생산성을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특히 시장의 확대는 눈부신 것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아메리카 등 그야말로 세계 곳곳에 교역 요충지를 개발했으며 이를 위해 무력 사용도 주저하지 않았다. 시장의 확대는 질적 팽창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1657년 스웨덴 은행을 필두로 은행들이 속속 설립, 제조업자와 상인들에게 대출을 해주기 시작했고 은행 간의 협약에 의해 국제적인 신용장 거래도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주식회사의 출현이 없었다면 서양의 경제적 팽창은 그 완성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돛과 나침반에 의지하여 거친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원거리 무역은 큰 이윤을 낼 수 있는 기회였지만 반면에 큰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모험사업이었다.  

여기에서 주식회사 형태의 새로운 기업조직이 나타나게 되었다. 주식거래를 통해 많은 투자자들이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위험이 분산되고 막대한 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초기 주식시장에서는 참으로 황당한 사건들도 많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것이 '남해 거품'과 '미시시피 거품'이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에 참여한 영국 정부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당시 영국의 재무장관 로버트 할리는 이 빚을 변제할 방법을 여러모로 강구하다 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1711년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를 설립했다.

영국 정부는 남해회사에 스페인의 남미지역 식민지에 대한 무역 독점권을 주는 대신 회사가 유상증자를 통해 1000만파운드에 달하는 국채를 인수하도록 했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가로 매년 원금의 6% 가까운 돈을 돌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따낸 무역권의 내용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1년에 겨우 500톤 미만의 물량을 적재한 배 1척을 보내는 것으로 무역량이 제한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식 가격은 하락하지 않았고 오히려 상승세를 이어갔다. 회사가 1719년 또 다시 국채 인수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적 전망이 확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보다 결정적인 계기는 바닷물을 담수로 만든다거나, 무한동력의 차륜을 만드는 황당무계한 사업 계획과 주식을 사서 떼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에 대한 소문이었다. 남해회사의 주당 가격은 1720년 1월 128파운드에서 2월에는 175파운드,3월에는 330파운드로 올랐다. 급기야 주가는 8월에 1000파운드까지 급등한 후 곤두박질, 연말에는 100파운드까지 떨어졌다. 대출로 주식을 샀던 수천명의 투자자들이 파산했다. 만유인력 법칙으로 유명한 아이작 뉴턴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초기에 이 회사 주식을 샀다가 되팔아 상당한 수익을 챙겼으나 주식광풍이 분 이후 재투자하는 바람에 2만파운드를 잃었다.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30억원이 넘는다.

토머스 레벤슨이 쓴 '뉴턴과 화폐위조범' (박유진 역, 뿌리와이파리 2015)에 따르면, 뉴턴은 엄청나게 고평가된 남해 회사 (South Sea Company)주식에 투자했다가 1720년에 2만 파운드를 잃었다. 당시 그가 맡았던 조폐국장의 기본급이 연봉 500파운드였다고 하니, 자그만치 기본급 40년치의 손해를 본 것이다. 27년간 조폐국에 근무하면서 기본급과 수당 등을 포함해 연평균 1650 파운드라는 적지 않는 돈을 벌어들였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거의 12년치 수입에 맞먹는 손실을 입은 셈이다.
이런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뉴턴은 몰락하지 않았다. 그는 전 재산을 주식에만 걸지는 않았다. 비록 주식 투자로 큰 돈을 잃었지만 그 뒤에는 훨씬 안정적인 사업체에 투자해 케임브리지 출신의 학자치고는 돈을 꽤 많이 벌었다. 그래도 조폐국장으로 일하면서 번 돈의 30%를 단 한 번의 투자실패로 날렸으니 꽤나 속이 쓰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불린 그가 피라미드 금융사기와 같은 사업에 투자했다는 사실에 더욱 가슴아팠을 것이다. 이에 대해 '뉴턴과 화폐위조범' 의 저자 토머스 레벤슨은 이렇게 설명한다.
"뉴턴은 남해 회사 사기의 수학적 오류, 곧 모든 피라미드 체계의 중심에 있는 오류를 간파해냈어야 했다. 시간에 따른 약정 지급금을 보고 해당 급수를 전개해보면 (뉴턴이 1665년에 풀었던 문제다) 제공되는 총액이 총 지급 준비금을 초과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뉴턴과 화폐위조범>311쪽

같은 시기 프랑스에도 주식투기의 광풍이 불어 닥치고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금융업자인 존 로가 그 중심에 있었다. 연적을 살해한 혐의로 고향에서 도망쳐 파리에 머물던 그는 자신의 도박 친구이자 당시 프랑스 최고의 권력자인 오를레앙 공에게 지폐를 발행하여 국채를 상환하는 기발한 방안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의 골칫거리 하나를 해결해 준 대가로 지금의 미국 중부지역에 해당하는 루이지애나 개발을 담당할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를 설립하는 특권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금과 은이 무진장 널려있다는 루이지애나에 대한 루머와 미시시피 회사가 종국에는 프랑스의 모든 해외무역을 독점할 것이라는 전망이 투자자들을 들끓게 했다.  

주가는 폭등하기 시작했고 곧 액면 가격의 20배까지 치솟았다. 이 화려했던 미시시피의 꿈은 수천명의 희생자를 만들면서 2년 만인 1720년 그 허망한 끝을 보고 말았다. "나는 별들의 움직임을 계산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고 한 뉴턴의 말은 오늘날의 투자자들에게도 유용한 경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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