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메이저리그 개척자 노모의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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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개척자 노모의 도전기

기사입력 2014.01.23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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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저리그 개척자 노모의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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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개척자' 노모 히데오

일주일 남짓 차이로 희비가 엇갈렸다. 일본인 전 메이저리거 노모 히데오(46)를 두고 하는 소리다.

노모는 1월 9일(한국시간) 열린 미국야구기자협회의 ‘2014 명예의 전당’ 입회 투표에서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거로는 처음으로 후보에 올랐다. 미 야구계는 메이저리그 통산 323경기에 등판해 123승 109패 탈삼진 1,912개, 평균자책 4.24의 성적을 거둔 노모의 명예의 전당 입회 가능성을 낮게 봤다. 통산 성적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엔 다소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한편에선 노모가 루키 신분으로 신인왕과 최다 탈삼진왕을 동시에 거머쥔 점, 일본인 최초의 올스타게임 출전, 메이저 양대리그 노히트 노런 달성 등을 내세우며 그의 명예의 전당 입회가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 아니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자의 예상이 맞았다. 노모는 전체 571명의 투표인단 가운데 1.1%에 해당하는 6표를 얻는 데 그쳤다. 입회 기준인 75%와 후보 자격 유지 기준인 5%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과였다. 이로써 노모의 명예의 전당 헌액은 물 건너갔고, 앞으로의 투표에서도 후보로 나설 수 없게 됐다. 사실상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입회가 원천봉쇄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8일이 지난 17일. 노모의 명예의 전당 헌액 소식이 들렸다. 물론 무대는 미국이 아니었다. 일본이었다. 이날 도쿄 명예의 전당 박물관은 ‘2014 일본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다이에(소프트뱅크의 전신) 호크스의 강타자였던 아키야마 고지와 미·일 통산 381세이브를 기록한 사사키 가즈히로 그리고 노모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명예의 전당 헌액에 실패한 노모가 좌절을 딛고, 일본 명예의 전당 입성엔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일본 최고의 에이스에서 ‘배신자’의 대명사가 됐던 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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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가 일본 명예의 전당 입회 소식을 듣고서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장면

노모는 일본 명예의 전당 헌액 소식을 듣고서 “(전당 헌액은) 기자 투표로 선정되는 것으로, 현역 시절 기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헌액) 자격을 얻고서 1년 만에 뽑혀 솔직히 놀랐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긴테쓰 시절부터 은퇴할 때까지 줄곧 언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해 좋지 않았다기보단 노모 스스로 언론과의 접촉을 꺼렸다. 이유는 “내가 한 말을 언론이 왜곡해 기사화”하거나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처럼 보도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야구주간지 <슈칸베이스보루(주간야구)>의 야나모토 모토하루 전 편집부국장은 “긴테쓰 시절부터 노모에게 뭔가를 물으면 늘 짧은 대답만이 돌아왔다”며 “하루는 ‘대답이 너무 짧아 기사를 쓸 수 없다’고 하소연했더니 ‘그래야 여러분이 왜곡된 기사를 쓰지 않을 게 아니냐’는 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노모가 언론을 기피하자 언론도 노모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야나모토 전 편집부국장은 “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대부분 거절해 기자들 사이에선 언제부터인가 노모는 ‘독자들의 관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사를 써야 하나, 정말 상대하기 곤란한 골치 아픈 취재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언론뿐만이 아니었다. 노모는 일본야구계와도 관계가 좋지 않았다. 1994시즌이 끝나고 노모는 ‘아시아 선수는 미국에서 성공할지 못한다는 편견을 깨겠다’며 이른바 ‘상식 파괴’를 들고 나왔다. 노모가 이를 실천에 옮겨 전격 미국 진출을 선언하자 일본 야구계는 환영보단 그를 “배신자”로 부르며 비난했다.

소속팀이던 긴테쓰 버펄로스(현 오릭스)는 “구단의 은혜를 모르고, 미국으로 도망간 2류 투수”라고 비난했고, 유명 감독과 코치들 역시 앞다퉈 “스타로 만들어준 일본 야구계의 고마움을 저버리고, 자신의 이익만을 좇아 미국으로 날아간 ‘철없는 투수’”라고 힐난했다. 노모와 가까웠던 야구인들조차도 ‘노모가 너무 이기적인 판단을 내렸다’며 아쉬워했다.

종신 고용과 조직 내 수직 관계가 당시까지 ‘사회적 상식’에 가깝던 일본인지라, 노모의 ‘상식 파괴’는 어쩌면 반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것일지 몰랐다.

노모를 향한 비난은 야구 평론가와 언론이 합세해 이른바 ‘시기상조론’과 ‘미국 필패론’을 내세우며 정점을 찍었다. 당시 대부분 야구평론가와 언론은 “아직 아시아 투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기엔 시기상조”라는 말로 노모의 성공을 부정적으로 내다봤다.

이런 주장의 배경엔 일본에서 활약하는 외국인 선수들의 “NPB(일본야구기구)리그는 미국의 더블A나 트리플A 수준”이라는 평가가 숨어 있었다. 여기다 NPB리그 최고 투수로 불리던 에나쓰 유타카가 1985년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것도 한 배경이 됐다. 무엇보다 비시즌에 열리던 미·일 올스타전의 실력 차가 고려된 평가였다. 일본은 미 올스타에 간간이 승리하기도 했지만, 일본야구계는 “메이저리그는 원래 비시즌 기간엔 휴식을 취한다. 오늘 일본 올스타의 승리는 운”이라는 말로 스스로 승리의 의미를 축소 해석했다. 따지고 보면 비시즌 기간에 정상 컨디션이 아닌 건 일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일본야구계의 엄격한 폐쇄성과 지나친 겸손이 대세를 이루며 노모는 ‘배신자’로 낙인 찍혔고, 그의 미국 진출 선언은 ‘실패가 뻔한 모험’으로 폄훼됐다.

노모 "선수는 구단의 부속품인가?"

그렇다면 과연 노모는 ‘배신자’였을까. 일본야구계, 구단, 언론은 노모에게 배신자 낙인을 찍었었지만, NPB리그 선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선수들에게 노모는 ‘일본의 커트 플러드’였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 소속이던 플러드는 1969시즌이 끝나고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된다. 플러드는 구단의 트레이드 결정에 반발해 메이저리그 선수노조의 도움을 받아 법정 투쟁을 전개한다. 당시까지 흑인 차별이 심했던 필라델피아로 떠나기보다 세인트루이스에서 계속 뛰고 싶던 플러드는 선수를 독점적으로 보유한 채 구단 마음대로 선수를 교환하는 ‘보류조항(Reserve Clause)’을 노예제도에 비유하며 “보유조항은 ‘노예제도 금지’를 명시한 미 수정헌법 13조를 정면으로 위반한다”고 주장했다.

미 전역이 플러드의 법정 투쟁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그러나 플러드의 주장은 연방대법원에서 패소하며 허무하게 끝났다. 플러드는 1971년 그라운드로 복귀했지만, 법정 투쟁에 모든 에너지를 소비했는지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그해를 끝으로 쓸쓸히 은퇴했다. 하지만, 플러드의 투쟁에 고무된 선수들은 ‘보류조항’ 철폐를 위해 계속 싸웠다. 그리고 결국 1977년 ‘한 팀에서 6시즌을 뛴 선수는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린다’는 조항을 관철하기에 이른다.

노모도 플러드처럼 ‘보유조항’에 반발해 싸웠다. 다른 게 있다면 노모는 소속팀이던 긴테쓰를 떠나고 싶어 싸웠다는 것이다. 1994시즌이 끝나고 노모는 구단과 갈등을 빚는다.

1990년 프로 데뷔 때부터 1993년까지 4년 연속 최다승, 최다 탈삼진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거둔 노모는 그러나 1994년 오른쪽 어깨를 다치며 주춤한다. 4년 연속 216이닝 이상, 14번 이상의 완투를 기록했던 그를 보며 일본야구계는 “무리가 빚은 부상”이라고 평했다. 일부에선 “부상 부위가 어깨라, 다시 마운드에 서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노모는 위축되지 않았다. 되레 에이전트인 댄 노무라를 앞세워 구단에 “앞으로 FA를 취득하려면 6년 남았으니, 6년에 20억 엔을 달라”는 초고액의 다년 계약을 요구했다. 게다가 당시로선 생경했던 에이전트의 대리 협상 인정을 촉구했다.

긴테쓰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일본야구계도 “요구 사항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무리하다”며 노모에게 등을 돌렸다. 긴테쓰는 노모가 요구 사항을 거둬들이지 않자 “어차피 우리와 계약하지 않고, 버티면 ‘임의탈퇴’ 신분이 될 수밖에 없다”며 “결국 손해를 보는 건 노모 자신”이라는 말로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노모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결국 긴테쓰는 그를 임의탈퇴 처리하고 말았다. 노모의 야구인생은 일시중단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임의탈퇴는 노모의 메이저리그 진출 출발점이 됐다.

노모는 긴테쓰가 내민 임의탈퇴서에 흔쾌히(?) 사인했다. 그리고 1995년 2월 LA 다저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으며 미국 진출을 선언한다. 결과적으로 노모의 미국 진출은 훗날 한국, 일본, 타이완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가속화하는 추진체가 됐고, 일본 프로야구의 FA 기간이 줄며, 에이전트 제도가 NPB리그에서 인정받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악인이 돼야 했던 노모의 메이저리그 진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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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인야구에서 최고 투수와 최고 타자로 불린 노모(사진 왼쪽부터)와 후루타 아쓰야가 기념촬영에 응하는 장면. 두 선수는 프로 전향 후 역시 최고의 투수와 포수로 우뚝 선다.

기자는 지난해 노모의 에이전트였던 댄 노무라와 노모와 긴테쓰, 뉴욕 메츠에서 함께 뛰었던 전 메이저리거 요시이 마사토를 만났다. 두 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노모가 무리한 요구를 내세운 바람에 긴테쓰를 떠난 게 아니라 긴테쓰를 떠나려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각종 인터넷 백과사전에 올라 있는 내용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두 이가 밝힌 내막은 다음과 같다.

노모는 1993년 오기 아키라 감독(작고)이 물러나고 스즈키 게이지 신임 감독이 부임하면서 심적으로 힘들어했다. 현역 시절 대투수였던 스즈키 감독은 노모에게 “볼넷을 줄여야 한다”며 투구폼 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투구폼만은 손대기 싫었던 노모는 스즈키 감독과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여기다 스포츠용품 사용을 둘러싸고도 구단과 갈등을 빚는다. 노모는 이미 스포츠 용품업체 나이키와 계약한 터였다. 1994년 올스타전에서 다른 선수들이 미즈노 스파이크를 신은 데 반해 노모만 나이키 스파이크를 신고 나오자 구단은 노모에게 강한 불쾌감을 나타낸다. 퍼시픽리그로부터 미즈노 스파이크 사용 조건으로 돈을 받은 긴테쓰로선 노모의 둘출행동은 ‘반역’에 가까웠다. 하지만, 노모는 “어째서 선수의 초상권을 구단이 강제하려는 것이냐”며 되레 구단의 강요에 반발했다.

훗날 노모는 “긴테쓰 구단이 선수를 소모품이나 하인 취급하지 않고, 동반자로 생각했다면 미국으로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구단과 선수가 동등한 관계인 메이저리그를 경험하고서 ‘미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어쨌거나 댄 노무라는 “이때부터 노모가 긴테쓰를 떠나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1994년 시즌 중반. 어깨 부상으로 2군에서 컨디션을 조절하던 노모는 외국인 선수 에이전트로 활동하던 댄 노무라를 만난다. 노모는 댄 노무라에게 “긴테쓰에서 떠나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오랜 꿈이던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모가 미국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FA 신분으로 미국 무대에 도전하려면 앞으로 6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고민 끝에 댄 노무라는 NPB 야구 규약을 번역해 메이저리그 에이전트인 얀 텔렘에게 보낸다. 텔렘은 “NPB규약 안에 ‘임의탈퇴가 되면 다른 팀에서 뛸 수 없고, 복귀했을 때도 원소속구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문구가 있지만, ‘일본을 제외한 외국에서 뛸 수 없다’ 같은 조항은 발견하지 못했다”며 “바로 이 점을 공략할 것”을 조언한다.

댄 노무라는 곧바로 MLB 사무국에 ‘NPB리그에서 임의탈퇴된 선수가 미국에서 뛸 수 있는가’란 질의서를 보낸다. 그런 사례를 다뤄본 적이 없는 MLB 사무국은 NPB 사무국에 ‘일본의 임의탈퇴 선수가 국외리그로 이적해도 좋은가’란 질문서를 발송한다.

NPB 사무국은 별 생각없이 ‘일본의 임의탈퇴 선수가 다시 NPB리그에서 현역으로 뛰려면 반드시 원소속구단과 계약해야 한다’며 ‘미국팀과는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다’는 답변서를 보낸다.

NPB 사무국의 답변서를 손에 쥔 댄 노무라는 환호성을 지른다. 임의탈퇴 선수가 되면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은 중단되지만, 역설적이게도 국외 진출의 문은 열리는 셈이었다(지금은 규약이 바뀌어 해외리그에서도 뛸 수 없다.)

댄 노무라는 노모와 협의해 긴테쓰가 ‘임의탈퇴’라는 초강수를 쓰도록 유도한다. 노모가 전례없는 구단의 에이전트 수용과 6년 20억 엔의 초고액 다년 계약을 요구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퇴도 불사하겠다”고 배수친을 친 것도 임의탈퇴가 되기 위한 ‘준비된 시나리오’였던 셈이다.

긴테쓰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임의탈퇴’라는 초강수 카드를 들었고, 노모를 향해 ‘머리를 조아려 반성해도 관용을 베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는 보기 좋게 에이스를 놓치는 악수(惡手)가 되고 말았다. 긴테쓰는 노모 측이 NPB규약의 맹점을 파고 들어 미국 도전을 선언하자 “말도 안 된다”며 반발했지만, “양국 사무국의 유권해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자 망연자실한다.

긴테쓰는 마지막 자존심을 살리려고 노모에게 “우리가 미국행을 주선해주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저는 이미 임의탈퇴된 선수입니다. 이제 더는 구단의 호의는 필요없습니다”라는 노모 측의 답변만을 들을 뿐이었다.

노모의 미국행이 나쁜 선례가 될 것으로 판단한 다른 구단들과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한 야구계 인사들은 앞다퉈 노모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도전 바이러스’를 전파한 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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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 히데오의 토네이도 투구폼

1995년 6년에 20억 엔을 요구하던 노모가 LA 다저스와 계약 보너스 200만달러, 연봉 10만9천 달러에 계약하자 일본야구계는 “노모가 일본야구의 가치를 떨어트렸다”며 분노했다. 그의 실패를 낙관하던 일부 야구인과 언론은 “연수비치곤 괜찮은 금액”이라며 비꼬기까지했다.

미 야구계도 노모의 성공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노모가 다저스에 ‘막’ 입단했을 때 당시 주전 포수였던 마이크 피아자는 “아직 그의 공을 받아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빅리그에서 살아남기엔 뭔가 부족해보인다”며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일본야구계의 냉소적 시각과 미국야구계의 회의적 반응 속에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노모. 하지만, 그는 실력으로 이 모든 부정적 전망을 뒤엎는데 성공한다.

오른쪽 어깨가 좋아진 노모는 마이너리그에서 호투하고서 1995년 5월 빅리그로 승격한다. 그리고 6월부터 진가를 발휘해 8월 올스타게임 멤버로 뽑히고, 13승 6패 평균자책 2.54 탈삼진 236개의 뛰어난 성적으로 빅리그 데뷔 시즌을 마친다. 내셔널리그 신인왕과 최다 탈삼진왕은 그의 차지였다.

이듬해에도 노모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16승·234탈삼진, 1997년엔 14승·233탈삼진으로 빅리그 데뷔 이후 3년 연속 13승, 190이닝, 230탈삼진 이상을 기록한다. 노모는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뛰던 2001년에도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메이저 양대리그에서 노히트 노런을 작성하는 대기록의 주인공이 된다.

특히나 노모는 등이 보일 정도로 몸을 비틀어 던지는 ‘토네이도 투구폼’으로 많은 이의 관심을 받는다. 토네이토 투구폼에서 나오는 ‘뚝’ 떨어지는 포크볼에 메이저리그 강타자들이 헛스윙을 연발하자 미국 야구팬들은 ‘노모 마니아’를 자처하며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다.

노모의 미국행에 비판적이었던 일본야구계와 언론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꿔 그를 ‘파이오니아(Pioneer, 개척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노모의 실패를 장담했던 유명 감독과 야구평론가들이 가장 앞장 서 노모의 도전 정신을 칭송했다는 건 눈여겨볼 대목이다.

1995년부터 2003년까지 7번의 10승과 4번의 220탈삼진 이상을 기록한 노모는 2004년부터 부상에 시달리며 하향세를 탄다. 그리고 2008년을 끝으로 마운드에서 영원히 내려온다.

그러나 노모로 끝난 게 아니었다. 스즈키 이치로, 사사키 가즈히로, 마쓰히 히데키, 마쓰자카 다이스케 같은 NPB리그의 슈퍼스타들이 노모의 뒤를 이어 미국 무대에 도전한다. 놀라운 건 다른 선수들의 미국 진출에 노모가 직간접으로 용기를 심어줬다는 것이다. 일례가 있다.

지난해 기자와 만난 전 메이저리거 요시이 마사토는 “노모의 조언이 없었다면 미국 진출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7시즌이 끝나고 요시이는 FA 자격을 취득했다. 그해 13승 6패 평균자책 2.99를 기록한 요시이를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큰돈을 들여 영입하고 싶어했다. 요시이도 요미우리에 마음이 끌렸다. 한편으론 오랜 꿈이던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즈음 노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밤중이었다. 노모가 ‘예전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요시이 씨도 오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머리라도 식히자’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노모를 만나러 갔다. 기분좋게 술을 한잔 했는지 노모는 얼굴이 상기된 채로 날 반기곤 이렇게 말했다. ‘요시이 씨. 만약 일본에 남아 요미우리나 다른 팀에 가게 된다면 평생 후회하며 살지 몰라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그럼 최소한 후회하며 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요시이는 “과거 긴테쓰 시절 함께 몸을 풀면서 내가 무심코 던진 ‘나도 미국 무대를 밟고 싶다’고 한 말을 노모가 기억하고 있었다”며 “노모의 조언을 듣고서 고심 끝에 메이저리그 진출로 마음을 굳혔다”고 털어놨다.

요시이는 일본 구단들이 내건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1998년 뉴욕 메츠와 1년 계약을 맺는다. NPB리그 선수가 FA를 행사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첫 번째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런 역사성과는 별개로 그의 연봉은 옵션을 제외하면 20만 달러에 불과했다. 주변에서 “요미우리와 계약했으면 최소한 5억 엔 이상은 받았을 텐데”하고 아쉬워한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아쉬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요시이는 빅리그 데뷔 첫해였던 1998년 6승 8패 평균자책 3.93을 기록하며 메츠와 2년에 500만 달러라는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에 성공한다.

이치로의 미국 진출도 노모의 영향이 컸다. 이치로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노모 씨가 빅리그에서 큰 성공을 거둔 뒤 일본으로 돌아와 TV에 출연했을 때 ‘이치로라면 반드시 미국에서도 성공할 겁니다’라는 말을 했다”며 “노모 씨의 이야기를 듣고 미국 진출과 관련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고 회상했다.

사사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사키는 지난 17일 일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뒤 언론과 나눈 인터뷰에서 “수많은 일본 선수가 미국 무대에 도전했지만, 역시 가장 기억나는 선수는 노모”라며 “노모는 미국 구단의 훈련법과 컨디션 조절법 하다못해 라커룸 관리인에게 어떻게 팁을 줘야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일본 선수들에게 개척자의 입장에서 많은 조언을 들려줬다”고 밝혔다.

현역 마감 때 ‘후회가 남는다’고 말했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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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베이스볼클럽이 주최한 유소년 올스타전에서 노모가 유소년 학생선수와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

19년 전, 노모를 ‘배신자’ 취급하던 일본야구계와 언론은 이번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그에게 표를 몰아줬다. 노모는 유효 투표 324표 가운데 267표를 얻어 최다 득표로 일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후보로 오른 지 1년 만의 명예의 전당 입성이라 더 의미가 깊었다. 특히나 45세 4개월의 나이에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되면서 사상 최연소 헌액자가 됐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영광스러운 순간임에도 노모는 도쿄 야구박물관에서 거행된 헌액 시상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설립한 ‘노모 베이스볼클럽’이 자리잡은 효고현 도요카시에 남았다. ‘노모컵 어린이 야구대회’가 마침 그곳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야나모토 전 <슈칸베이스볼> 편집 부국장은 “보통 야구인이었다면 헌액 시상식에 참가했을 일이었지만, 아마추어 야구 발전’에 남은 야구인생의 방점을 찍은 노모에겐 ‘어린이 야구대회’를 훌륭하게 개최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우선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노모의 책임감은 유명하다. 일본의 스포츠 격주간지 <넘버>가 펴낸 ‘야구선수 25명이 꼽는 나의 베스트 게임’이란 책에서 노모는 1990년 4월 29일 긴테쓰에서 따낸 프로 데뷔 첫 승리와 1995년 5월 2일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베스트 게임’으로 꼽았다. 책에서 노모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회인야구팀 신일본제철에 입사했을 때도 그랬지만, 늘 후배들을 의식해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사소한 행동이 내 뒤를 밟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선지 긴테쓰에 입단했을 때 ’내 행동과 성적에 따라 신일본제철 야구팀이 사라질 수도, 평판이 나빠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여러가지 중압감이 플러스가 됐는지 프로에서 순조롭게 첫 승을 거둘 수 있었다. 프로 데뷔 첫 승을 따내고서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아마추어 야구 발전’이라는 강한 책임감 때문인지 그는 야구계를 기웃거리는 대신 사비를 털어 사회인, 동호인, 유소년 야구 활성화에 매달리고 있다.

노모는 은퇴식에서 “홀가분하다” “후회 없다” “속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여느 선수들과 달리 “현역에서 물러나면서 후회가 많이 남는다”고 밝혔다. 후회는 대기록 작성에 대한 미련도, 돈에 대한 애착도, 명예를 누리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좋아하는 야구를 계속 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에서 나온 말이었다.

일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노모는 ‘배신자’ 딱지를 떼게 됐다. 그리고 그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든 간에 일본야구를 보다 큰 무대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개척자’로 평가받게 됐다. 이젠 후회보단 긍지를 느끼며 살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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