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괴물을 누가 퇴물로 만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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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을 누가 퇴물로 만들었나

기사입력 2013.10.0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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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을 누가 퇴물로 만들었나

LA 다저스 선발 투수 류현진. 라쿠텐 골든이글스 선발 투수 다나카 마사히로. 한국과 일본이 자랑하는 ‘괴물’ 투수들이다. 류현진은 한국 프로야구 제일의 선발 투수로 군림하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14승 8패 평균자책 3.00을 기록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류현진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특급 투수’란 호평을 듣는다.

다나카 역시 기세가 대단하다. 다나카는 10월 1일 니혼햄 파이터스전에서 승리투수가 되며 올 시즌 개막 이후 23연승에 성공했다. 지난 시즌 막판 4연승까지 더한다면 27연승. 올 시즌을 끝으로 다나카는 미국 진출이 유력한 상황이다.

이제는 한·일 야구계를 대표하는 대투수로 우뚝 섰지만, 8년 전 이맘때만 해도 두 투수는 ‘괴물’이 아니었다. 정작 ‘괴물’로 불린 투수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한기주(KIA)와 10월 1일 은퇴를 선언한 스지우치 다카노부(전 요미우리)였다.

2005년 가을. 한·일 두 괴물, ‘한기주-스지우치’의 맞대결

지난 8월 일본을 찾았다. 일본 모 구단 스카우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신인 스카우트 시 무엇을 주목해 보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현재의 기량보단 미래의 가능성에 주목한다”는 것이었다. 그 스카우트는 “고교생 투수의 경우 제아무리 속구 구속이 빨라도 전체적인 투구 메커니즘, 골격, 내구성 등이 떨어지면 ‘제2의 스지우치’가 될 수 있다”며 “신인 스카우트에선 반드시 다면평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스지우치 다카노부(26). 지금은 ‘실패한 신인 스카우트’의 대명사로 불리는 선수다. 하지만, 8년 전만 해도 스지우치는 모든 구단이 손에 넣고 싶어한 ‘괴물 투수’였다. 한국 야구계에서도 스지우치는 웬만한 일본 프로야구 선수보다 더 잘 알려진 이였다.

2005년. 오사카 도인고교 3년생이던 스지우치는 그해 일본 고교야구 최고 에이스로 꼽혔다.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시속 156km의 강속구를 뿌리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는데, 시속 156km는 당시까지 일본 고교 좌투수 가운데 역대 최고 구속이었다. 한술 더 떠 스지우치는 같은 대회에서 한 경기 19탈삼진을 기록한 데 이어 4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을 거두며 ‘닥터 K'의 명성을 얻었다.

그해 9월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스지우치가 일본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건 당연했다. 1998년 마쓰자카 다이스케의 활약으로 3회 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무관에 머물렀던 일본은 이번엔 스지우치를 내세워 7년 만의 우승기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대표팀은 “우리 팀의 에이스는 스지우치”라며 “‘숙적’ 한국전에 반드시 스지우치를 등판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문학구장엔 일본 프로팀과 메이저리그 팀들을 합쳐 총 15개 구단의 스카우트가 총출동해 스지우치를 관찰했다.

그렇다고 한국이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일본에 ‘좌완 강속구 투수’ 스지우치가 있다면 한국엔 ‘우완 강속구 투수’ 한기주(26)가 있었다. 당시 광주 동성고 3년생이던 한기주는 “당장 프로에서 뛰어도 10승이 가능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괴물 투수였다. 속구 최고 구속이 시속 154km(당해년도 KIA 스카우트팀 측정치)에 이르렀고, 포크볼과 슬라이더 그리고 커브 등의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던졌다. 연고지 구단 KIA는 그런 한기주를 메이저리그 구단에 뺏기지 않으려고 계약금 10억 원을 베팅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계약금 10억 원 시대를 연 한기주를 일본 기자들은 ‘백만 달러의 사나이’라고 부르며 큰 관심을 나타냈다.

결승 전까진 두 투수의 명암이 갈렸다. 먼저 스지우치다. 그는 예상대로 호투했다. 스지우치는 9월 4일에 열린 예선리그 1차전 타이완전에서 6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5타자 연속 탈삼진을 포함해 총 9개의 삼진을 잡았고, 안타는 1개밖에 내주지 않았다.

다음날 열린 예선 2차전 한국전에서도 스지우치는 선발로 등판해 9회까지 완투했다. 결과는 4피안타, 10볼넷, 무실점. 스지우치의 호투로 일본은 타이완, 한국을 꺾고 손쉽게 준결승에 올랐다. 전날 타이완전에서 94개의 공을 던졌던 스지우치는 이날 한국전에서도 투구수 165개를 기록하며 이틀 동안 총 259개의 공을 뿌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일부에서 ‘혹사가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자 일본 대표팀 사코다 요시아키 감독은 “스지우치는 공을 많이 던질수록 더 강한 공을 던지는 투수”라며 “2일간 259개의 공을 던진 건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정상적 투구’”라고 주장했다. 스지우치 역시 “팔에 별 부담이 없다”고 밝혔다. 이때만 해도 사코다 감독과 스지우치는 자신들의 말이 얼마나 치명적 결과로 돌아올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승승장구하던 스지우치와 달리 한기주는 준결승전까지 다소 고전했다. 예선 첫 경기 타이완전에서 간단히 한 타자를 우익수 플라이 아웃으로 간단히 처리한 한기주는 2차전 일본전에선 등판하지 않았다. 기대했던 ‘한기주-스지우치’ 맞대결은 일단 무산됐다.

대신 한기주는 준결승 타이완전에 한국이 4대 1로 앞선 9회 초 2사 1루에 등판했다. 시속 150km 강속구로 타이완 타선을 봉쇄할 것으로 보였던 한기주는 그러나 불의의 2점 홈런을 맞고서, 다시 두 타자 연속 안타를 맞으며 4대 4 동점을 허용했다. 결국 한기주는 아웃카운트를 한 개도 잡지 못한 채 마운드를 김광현에게 물려주며 강판당했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연장 10회 말 최주환의 끝내기 안타로 5대 4 신승을 거두며 가까스로 결승에 진출했다.

한기주와 스지우치의 맞대결은 결승에서 펼쳐졌다. 사실 이날 한국 선발 투수는 김광현이 유력했다. 좌타자가 많은 일본 타선에 맞서려면 좌투수가 유리하다는 계산이었다. 가뜩이나 김광현은 예선 2차전 일본전에서 5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 준결승 타이완전에서도 한기주에게서 마운드를 이어받아 1⅓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아 팀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바 있었다.

하지만, 결승전 당일. 한국 코칭스태프는 선발투수를 한기주로 확정했다. 한기주가 선발투수를 자청한 까닭이었다. 훗날 한기주는 “언론에서 연일 스지우치와 날 라이벌로 묘사한 통에 꼭 한 번은 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감독님께 부탁해 우여곡절 끝에 선발로 등판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결승전 8회까진 한기주가 스지우치를 압도했다. 한기주는 8회까지 시속 153km의 강속구(한국 측 스피드건 기준)를 앞세워 2실점했다. 반면 스지우치는 8회까지 시속 155km의 강속구를 던지며 호투를 펼쳤지만, 4실점으로 패전 위기에 몰렸다. 라이벌과의 맞대결에서 판정승을 눈앞에 둔 한기주. 그러나 9회부터 행운의 여신은 한기주 편이 아니었다.

한기주는 9회 말 1사를 잘 잡았으나, 두 번째 타자에게 좌전안타를 허용하고서 주춤했다. 감독은 마운드에 올라 투수 교체를 시도했다. 하지만, 한기주는 “다음 타자들이 우타자들이라 자신 있다”며 감독을 설득했다. 결국 감독은 마운드에서 내려왔고, 한기주는 대타 마사키 슈헤이와 승부를 펼쳤다. 결과는 예상 밖의 2점 홈런. 승리를 눈앞에 뒀던 한국은 불의의 2점 홈런을 맞고서 동점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 홈런으로 경기 분위기는 일본 쪽으로 기울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장 10회 말. 일본은 선두 타자 고지마 히로키가 한국의 두 번째 투수 김광현에게 우월 끝내기 솔로홈런을 쳐내며 5대 4 극적인 역전승에 성공한다.

결승전에서 팀 승리를 지켜내지 못한 한기주는 고갤 숙인 채 문학구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반면 연장 10회까지 173개의 공을 던지며 완투한 스지우치는 일본 우승에 환호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스지우치는 대회 최고 승률(10할)상과 평균자책(1.08)상을 휩쓸며 대회 최고의 스타로 부상했다.

요미우리 신인드래프트 1순위 지명자의 엄혹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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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지우치(사진 오른쪽 교복입은 이)는 고교를 졸업하면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미래가 기다릴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현실은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한기주는 대회 전 이미 KIA와 계약을 끝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스지우치는 대회가 끝나고서 신인지명회의에 참여했다.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스지우치를 많은 팀이 주목했다. 그 가운데 오릭스 버팔로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스지우치 영입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2005년 10월 3일 열린 고교생 드래프트에서 두 팀은 동시에 스지우치를 1순위로 지명했다. 두 팀 이상 동시 지명할 경우 추첨을 통해 최종 교섭권을 정하기에 두 팀 관계자는 한 장씩 추첨권을 빼 들었다. 먼저 환호한 쪽은 오릭스였다. 추첨자로 나선 나카무라 가쓰히로 오릭스 단장은 추첨권을 뽑고서 환호성을 질렀다. 반대로 요미우리 추첨자로 나선 호리우치 쓰네오 요미우리 감독은 나카무라 단장의 환호성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다 테이블로 돌아왔다.

스지우치는 무수히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 속에서 굳은 표정으로 “오릭스는 아주 좋은 구단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릭스의 환호도 잠시. 요미우리 관계자들이 주최 측에 찾아가 추첨권을 보이며 강하게 항의하자 잠시 후, 장내에 다음과 같은 안내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바로 “스지우치의 교섭권은 요미우리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은 이랬다.

원래 두 장의 추첨권엔 서로 다른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하나는 ‘교섭권 확정’이라는 도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프로야구기구’가 표시된 낙인, 즉 ‘꽝’이었다. 그러니까 ‘일본프로야구기구’가 낙인 찍힌 추첨권을 뽑은 나카무라 단장이 이걸 ‘교섭권 확정’을 뜻하는 추첨권인 줄 알고 오인하며 생긴 희대의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몇 분 만에 입단팀이 바뀐 스지우치는 굳은 표정으로 오릭스행을 받아들일 때와는 달리 해맑은 미소로 “어렸을 때부터 요미우리 팬이었다”며 “좋아하는 팀에 입단하게 돼 매우 기쁘다”는 진심을 털어놨다.

요미우리는 스지우치에게 계약금으로 1억 엔(약 11억 원)을 안겼다. 마쓰이 히데키 이후 오랜만에 입단하는 고시엔대회 스타 출신의 신인이라, 요미우리는 계약금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으로 요미우리는 내심 스지우치가 2002년 신인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해 데뷔 시즌 6승을 거둔 고졸 신인 사나다 히로키나, 2005년 역시 고졸 신인으로 입단해 데뷔 시즌 5승을 거둔 다르빗슈 유처럼 즉시 전력감이 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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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에 입단한 스지우치의 스프링캠프 소식을 1면에 전한 일본 스포츠 전문지

하지만, 스지우치는 다르빗슈가 되지 못했다. 1979년 신인드래프트 1순위로 요미우리에 입단했으나 1군 경기에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퇴단했던 고졸 투수 하야시 야스히로 쪽에 가까웠다.

2006년 스지우치는 왼쪽 어깨 통증과 제구 난조가 겹치며 1군 무대에 서지 못했다. 프로 2년째인 2007년엔 왼쪽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며 역시 1군 무대를 밟는 데 실패했다. 2008년 다시 공을 잡으며 재기를 꿈꿨지만, 2011년까지 그의 주무대는 2군이나 국외 교육리그였다. 2012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8월 요미우리 입단 이후 처음으로 1군 부름을 받은 것이다.

당시 스지우치는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는 것 같다”며 “1군에서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도록 죽을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다짐은 현실화하지 못했다. 스지우치는 1군 승격 6일 만에 공 하나도 던지지 못하고 짐을 싸서 다시 2군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리고 올 시즌.

다시 왼쪽 팔꿈치가 고장 나 관절경 수술을 받으며 스지우치의 팀 내 입지는 눈에 띄게 좁아졌다. 결국 8월 31일 데이쿄대와의 교류전에서 속구 구속이 시속 120km대밖에 나오지 않자 요미우리는 희망의 끈을 끊었고, 10월 2일 스지우치를 방출했다. 스지우치 역시 방출이 결정되자 담담한 표정으로 “어깨와 팔꿈치 통증에서 해방돼 안심”이라고 말하고서 “이제 야구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 제2의 인생을 살겠다”는 은퇴 의사를 밝혔다.

프로 경력 8년 동안 어깨와 팔꿈치 부상으로 신음한 스지우치. 그는 신인지명회의에서 1순위로 지명됐지만, 한 번도 1군 마운드를 밟지 못한 채 팀을 떠나는 요미우리 구단 사상 4번째의 불운아가 됐다.

한기주와 스지우치, 게으른 천재? 반대였다.

한기주는 동갑내기 스지우치보단 시작이 좋았다. 2006년 KIA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해 10승 11패 8홀드 1세이브 평균자책 3.26을 기록했다. 프로 2년 차 때부턴 마무리로 전향해 2007년 25세이브를 거뒀다. 특히나 2008년엔 26세이브 평균자책 1.17을 기록하며 리그 정상급 마무리로 우뚝 섰고, 그해 열린 베이징 올림픽에 대표팀 멤버로 출전했다.

그러나 한기주의 전성시대도 오래가지 못했다. 2009년 팔꿈치 인대접합수술, 2011·2012년 손가락 수술, 2013년 어깨수술을 받으며 등판수가 격감했고, 존재감 역시 희박해졌다. 선동열 KIA 감독은 “현재 (한)기주는 어깨 수술 이후 재활 중”이라며 “내년 시즌 마운드에 설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기주와 스지우치. 어째서 1987년생 동갑내기 한·일 괴물 투수들은 프로 입단 후, ‘괴물’에서 ‘퇴물’이 된 것일까.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노력이 부족하고, 정신력이 빈약했던 것일까. 노력 부족은 사실이 아니다. 한기주는 역대 KIA 감독들이 “너무 훈련량과 생각이 많아 탈”이라고 걱정했던 투수다.

스지우치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스지우치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2008년 요미우리 2군에서 그를 봤을 때 요미우리의 한국인 백업포수 류환진 씨는 “스지우치는 누구보다 열심히 땀을 흘리는 선수”라며 “야구에 대한 열정과 예의 역시 또래 투수들보다 몇 배는 강한 선수”라고 평했다. 다른 구단 관계자 역시 “스지우치는 가난한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으로, 그의 팔 하나에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다”며 “그래선지 어떻게든 성공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고 말했다.

팔꿈치 인대 손상으로 투구하는 게 기적이었던 한기주의 숨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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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주가 바라보는 미래는 밝았다. 하지만, 그의 머리 위엔 어두운 먹구름이 깔리고 있었다

정작 두 투수의 프로 성공을 막은 건 혹사에 따른 부상이었다. KIA는 2005년 5월 ‘연고지 1차 지명 대상자’였던 광주 동성고 3학년 한기주의 팔꿈치 상태를 체크했다. 그즈음 끝난 대통령배 대회 이후 한기주가 팔꿈치 이상을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한기주는 훗날 “대통령배 준결승 때 처음으로 팔꿈치가 아팠다”고 털어놨다.

병원 진단 결과 팔꿈치 인대가 다소 손상됐다는 소견이 나왔다. 담당의는 “중학교서부터 고교 1, 2학년 때까지 원체 많이 던져 팔꿈치 상태가 좋지 않다”며 “충분히 휴식을 취하면 더는 악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KIA는 여러 경로를 통해 “동성고가 대통령배에서 우승한 만큼 8월에 열리는 봉황대기대회에선 (한)기주가 많은 이닝을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학교 측에 완곡하게 전달했다. 덕분에 한기주는 마무리로 나서며 짧은 이닝을 소화했다. 대신 2학년 양현종, 1학년 윤명준이 분투했다.

KIA의 한기주 보호는 그러나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제동이 걸리고 만다. 정재공 전 KIA 단장은 “가능한 기주가 선발이 아닌 마무리로 몇 이닝만 소화하길 바랐다”며 “하지만, 결승전에서 스지우치와 맞대결을 벌이며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정 전 단장은 “기주가 원체 승부욕이 강한 탓도 있지만,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며 “그때 9회까지 던지고 나서 팔꿈치가 크게 망가졌다”고 밝혔다.

사실이다. KIA는 한기주가 입단하고서 미국과 일본에서 팔꿈치 상태를 점검했다. 결과는 ‘팔꿈치 인대 세 가닥 중 두 가닥이 90% 이상 손상됐음’이었다.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의 창시자’ 프랭크 조브 박사는 “수술이 아닌 재활을 선택할 수도 있다”며 “그러나 투구수는 최대 50개, 적정 투구수는 40개로 한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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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입단 당시 한기주(사진=KIA)

계약금을 10억 원이나 안기며 ‘제2의 선동열’을 기대했던 KIA는 크게 낙담했다. 하지만, 한기주에겐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한기주 활용법을 두고 고민을 거듭하던 KIA는 2005년 10월 플로리다 인스터럭셔널리그에서 길을 찾게 된다. 한기주의 투구를 유심히 지켜보던 KIA의 자매구단 미네소타 트윈스의 코칭스태프가 “선발, 중간, 마무리 등 어느 보직을 맡겨도 제 역할을 할 투수”라고 칭찬한 게 단초로 작용했다.

미네소타 코칭스태프의 칭찬을 들은 KIA 코칭스태프와 구단은 “한기주를 마무리로 써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2006년엔 마무리로 쓸 기회가 없었다. 한기주 역시 마무리보단 선발을 원했다. 그러나 4, 5회 들어 갑자기 속구 구속이 떨어지며 한기주는 자신의 몸 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정 전 단장은 “그즈음 기주가 자기 몸 상태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며 “그 여파로 기주가 2군에 10일 동안 있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아야 했다”고 회상했다.

마무리로 전향한 2007시즌이 끝나고 한기주는 수술대에 오를 뻔했다. 정 전 단장이 “수술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덕분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몰라서 그랬지 기주 팔꿈치 상태가 최악이었다. 통증도 굉장했을 거다. 이런 팔꿈치 상태로 던지는 게 기적이었다. 일단 수술을 시키자는 게 내 방침이었다. 기주도 수술을 원했다. 하지만, 현장의 생각은 달랐다. ‘갑자기 마무리가 빠지면 안 된다’며 수술보다 재활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정 전 단장은 고민했다. 그때 한기주가 “일단 재활로 극복해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한기주는 고교 때부터 팔꿈치가 불편하자 엄청난 근력 훈련과 보강 훈련으로 이를 극복해오던 차였다.

정 전 단장은 “기주는 내가 본 야구선수 가운데 가장 성실한 친구였다”며 “팔꿈치 인대가 끊어진 걸 옆구리 근육으로 커버하려고 매일같이 엄청난 운동량을 소화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재활은 한계가 있었다. 2009년 여름. 한기주는 “2006년 프로 데뷔 이후 4년간 제대로 공을 때린다는 기분으로 던진 적이 없다”며 “팔꿈치 통증을 의식하다 보니 어깨에 자꾸 힘이 들어가 이러다 어깨까지 다칠 것 같다”고 걱정했다. 덧붙여 “현재 팔꿈치에 뼛조각까지 돌고 있어 30구 이상은 던지지 못한다”며 “구단에 지속해서 수술을 시켜달라고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즈음 한기주는 일부 팬들로부터 ‘불기주’라고 불렸다. 위기상황 때 확실히 불을 끄지 못한다는 게 이유였다. 더러의 팬들은 “선발도 확실히 맡지 못하고, 불펜에서도 믿음이 가지 않는 한기주는 희대의 먹튀”라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한기주는 변명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그저 구단이 자신의 수술을 허락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2009년 KIA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자 한기주는 드디어 수술대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적절한 시기를 놓쳤는지 몰랐다. 과도한 팬심이 가세하며 격려보단 비난, 위로보단 질타가 한기주의 등을 누르며 그는 부상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급기야 우려했던 어깨 부상을 당하며 현재 기약 없는 재활을 수행하고 있다.

4일간의 투혼, 그러나 남은 건 평생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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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시절 스지우치

스지우치의 부상도 주변의 욕심이 부른 인재(人災)였다.

스지우치는 “팔에 별 부담이 없다”고 강변했지만, 2005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4일간 3경기에서 25이닝 동안 432구를 던진 건 확실한 무리였다. 당시 일본 대표팀 감독이던 사코다의 “스지우치는 공을 많이 던질수록 더 강한 공을 던지는 투수”라는 주장은 에이스의 혹사를 정당화하려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스지우치는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을 당시 이미 왼쪽 팔꿈치 인대가 훼손되고, 염증까지 난 상태였다. 대회 이전까지 스지우치는 팔꿈치엔 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단기간에, 그것도 긴장감이 말도 못하게 심한 ‘국제대회’에서 432구를 던진 게 팔꿈치 부상과 어깨 통증의 원인이 된 것으로 일본야구계는 보고 있다.

한기주처럼 스지우치도 격려와 위로보단 비난과 질타에 시달린 선수였다. 명문구단 요미우리에 1순위로 입단하고, 계약금으로 1억 엔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스지우치는 은퇴할 때까지 ‘먹튀’로 불렸다. 그 부담을 덜고자 오버페이스하며 조기 복귀를 서둘렀지만, 그게 되레 독이 됐다. 프로에서 뛴 8시즌 동안 1군 기록은 고사하고, 2군에서도 4시즌밖에 던지지 못한 것도 번번이 오버페이스 때문에 부상이 재발한 게 한 이유였다.

스지우치는 은퇴를 발표하며 가장 추억에 남는 순간으로 2012년 6일간의 1군 승격 때를 꼽았다. 그는 “1군 선배들이 잘 대해줬고, 프로의 최고 선수들과 싸울 수 있었던 경험은 앞으로의 인생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며 담담하게 당시 추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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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마무리로 활약할 당시의 한기주. 아직 26살의 한기주는 퇴물이 되긴 이르다. 프로 입단 때부터 KIA 구단은 한기주의 몸 상태를 정밀 체크하며 잘 관리해왔다. 언젠가 다시 마운드를 밟는 날. 한기주의 모든 노력은 그제야 빛을 낼 것이다(사진=KIA)

한기주와 스지우치. 1987년생 동갑내기 투수들은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스지우치는 만년 유망주에서 전직 야구선수의 길을 택했다. 남은 건 한기주다. 한기주가 재활에 성공해 다시 마운드에 선다면 다시 ‘괴물’로 거듭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기주 역시 스지우치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괴물’이 ‘퇴물’이 된 1차적 책임은 선수 자신에게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기주와 스지우치의 경우만 따지자면 선수들에게만 책임을 묻기 어렵다. ‘2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다던 ‘괴물 투수’들을 부상으로 몰고 간 진짜 ‘괴물’들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진짜 괴물들’은 여전히 한·일 야구계를 지배하고 있다.

‘투혼’ '필승''대선수로 키우려면' '팀을 위한 무조건적인 희생' '내가 응원하는 팀 선수니까' '명장이 되기 위하여'라는 일방적 구호들이 ‘괴물 투수’들의 미래를 갉아먹는 한.

퇴물은 괴물의 미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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