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아무도 모르는 남자, 참 예수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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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남자, 참 예수의 발견

기사입력 2013.04.17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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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모르는 남자, 참 예수의 발견


“그는 비즈니스의 밑바닥에 있던 12명을 골라 조직을 만들어 세계를 제패했다(He picked up twelve men from the bottom ranks of business and forged them into an organization that conquered the world.)”

그는 누구인가? 예수다. 광고업자 브루스 바튼(Bruce Barton, 1886-1967)은 1925년에 출간한 [아무도 모르는 남자: 참 예수의 발견(The Man Nobody Knows: A Discovery of the Real Jesus)]에서 그렇게 말했다. 역사가들이 이 책을 논할 때에 가장 많이 인용하는 구절이다. 미국의 1920년대 시대정신을 논할 때에 꼭 거론되곤 하는 이 역사적인 책의 국내 번역판은 두 권이 나와 있다. [예수 영원한 광고인](김충기 역, 1995)과 [예수의 인간경영과 마케팅 전략](이동진 역, 2000)이다.


예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세일즈맨’이라는 게 바튼의 주장이다. 오늘날에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며 이 책을 포용하는 게 쉽겠지만, 1925년의 미국에선 충격으로 받아 들여졌다. 바로 그 해 여름 테네시주의 작은 마을 데이턴에선 고교 생물학 교사 존 스콥스(John T. Scopes, 1900-1970)가 수업시간에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은 이른바 ‘원숭이 재판’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 존 스콥스를 변호한 클라렌스 대로우(왼쪽)와 다윈의 진화론을 강하게 반대했던 정치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오른쪽)이 이른바 ‘원숭이 재판’ 법정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1925)

바튼은 그간 기독교인들에 의해 묘사돼 온 예수, 즉 나약하고 불행하고 기꺼이 죽으려고 하는 양(羊)의 이미지에 불만을 느껴 이 책을 쓰기로 했다고 밝히면서 전혀 새로운 예수 이미지를 제시한다. 예수는 건강하고 체력이 매우 좋은 활동파였으며, 사교에도 뛰어났고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아주 좋은 남성적 매력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또 바튼은 예수를 ‘현대 비즈니스의 창시자’로 간주하면서, 예수의 모든 언행을 비즈니스와 광고의 전략·전술 차원에서 분석했다. 예수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무엇을 했을까? 전국적인 광고인이 되었으리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바튼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비유법을 높이 평가했다.

“비유를 잘 해야 광고가 뜬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던 사람이 강도의 습격을 받아 쓰러져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갔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를 구해 준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핵심 사상을 비유한 최고의 광고 문안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예수의 비유법은 카피라이터가 연구해야 할 교과서이다.”

‘예수는 세일즈 맨’이라는 발칙한 주장을 하다

도대체 바튼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발칙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바튼은 1907년 앰허스트대학(Amherst College)을 졸업한 뒤 홍보전문가, 잡지사 기자 등으로 일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슬로건 작성 작업에 관여했다. 그는 이 일을 하면서 광고업자 알렉스 오스번(Alex Osborn)과 로이 더스틴(Roy Dustine)을 만났다. 1918년 오스본과 더스틴이 새로 개업한 광고 회사에 바튼을 초대함으로써 1919년 BDO(Barton, Durstine & Osborn)라는 광고대행사가 탄생했다. BDO가 1928년 조지 배튼 컴퍼니(George Batten Company)와 합병해 태어난 BBDO(Batten, Barton, Durstine & Osborn)는 업계 최고의 광고대행사가 되었다.

바튼은 1961년까지 BBDO의 사장을 지내면서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과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가 미국인들에게 아주 친근한 단어(household word)가 되게 만드는 등 광고인으로서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바튼은 카 딜러 대상 조사를 통해 그들의 90%가 회사 캠페인만으로도 차가 더 잘 팔린다고 대답한 것을 근거로 대대적인 기업 광고 캠페인을 전개해 미국인들이 GM을 ‘가족’처럼 여기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바튼이 세운 광고대행사 BBDO(Batten, Barton, Durstine & Osborn)의 기업고로. 바튼은 1961년까지 BBDO의 사장을 지내면서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과 제너럴 모터스(General Motors)가 미국인들에게 아주 친근한 단어(household word)가 되게 만드는 등 광고인으로서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하지만 광고업계에 대한 바튼의 진정한 기여는 다른 곳에 있었다. 1920년대까지도 광고업은 사회적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가 팽창하면서 광고의 중요성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적 냉대에 시달려야 했다. 예컨대, 사회 각계의 유명인사들을 싣는 ‘인명사전’들은 광고계의 주요 인물들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었다. 광고업계는 널리 쓰이는 ad 대신 advertisement로 불러줄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스스로 ad man 대신 consumption engineer라고 부르는 등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바튼은 광고업계의 대변인 노릇을 자청했다. 그는 죽는 날까지 광고업계의 권익 옹호와 더불어 그 사회적 위상의 격상을 위해 애를 썼다. 단지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광고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신앙 수준의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런 신념의 실천을 하는 가운데 쓰게 된 책이 [아무도 모르는 남자]다.

바튼은 책을 출간하기 전 원고를 부모에게 보냈다. 목사인 아버지가 반대하면 책을 내지 않겠노라고 했다. 그의 부모는 책의 출간을 허락했다. 그는 다른 지인들에게도 원고를 미리 보여줬는데, 그들은 대부분 이 책의 핵심인 ‘세일즈맨으로서의 예수’ 개념이 큰 논란을 부를 거라며 그걸 빼자고 했다. 그러나 바튼은 원래대로 밀어붙여 책을 출간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이 책이 1925년과 26년 2년간에 걸쳐 베스트셀러가 된 가운데 격렬한 찬반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목회활동을 하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예수의 복음은 분명한 성공의 복음이 아니라 분명한 실패를 통한 궁극적인 성공의 복음”이라며 바튼을 거부했으며, 대부분의 개신교․가톨릭 성직자들이 바튼을 ‘신성모독’을 저지른 자로 거세게 비난했다. 특히 근본주의자들의 분노가 거셌다. 종교적 우파뿐만 아니라 문화적 좌파도 비난에 가세했다.

그러나 대중은 바튼의 편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들도 바튼의 책을 읽고서 예수를 더욱 가깝게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일부 리버럴 크리스챤 지도자들도 호의적이었다. 날이 갈수록 세속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신앙을 유지하는 게 복잡해지고 어려워진 환경에 대한 지침서 역할을 했다는 점, 바로 이것이 [아무도 모르는 남자]가 누린 인기의 비결이었다.

‘바튼 붐’은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남자]는 바튼이 그 속편으로 쓴 성경 해설서 [아무도 모르는 책(The Book Nobody Knows)]과 함께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1956년에도 100만권 이상 팔려 나갔으며, 1965년엔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이 책들의 축약본을 연재하기도 했다. 독일, 스칸디나비아, 이탈리아, 일본 번역판까지 출간되었다.

흥청망청 1920년대의 사회상을 반영

‘바튼 붐’이 최초로 조성된 1920년대는 부자가 존경받는 시대였다. 경제와 사업은 번성했고, 주식시장은 급등했다. 실업률은 감소했고, 생활수준은 높아졌다. 정치 컨설팅을 겸했던 바튼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된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1872-1933)는 집권 기간(1923-1929) 내내 그런 시대적 상황에 어울리는 언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쿨리지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의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이다(The business of America is business)”라는 말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명언(?)에 맞장구를 치면서 “그 어느 때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정부가 이처럼 비즈니스와 완벽히 혼연일체가 된 적은 없었다”고 썼다. 같은 취지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공장을 건설하는 사람은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경배하는 것이다.” 그는 “광고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욕망을 창조하는 방법이다”는 말도 했는데, 이런 일련의 발언들은 흥청망청 대던 1920년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쿨리지는 “Keep Cool with Coolidge”라는 다분히 광고적인 슬로건을 사용해 1924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업은 국민적 종교가 되었으며, 역으로 교회는 사업만능 풍조에 충실했다. 예수를 믿으면 능률이 오른다는 광고도 등장했으며, 어느 교회는 교회 건립 자금으로 1백 달러를 기부한 사람 전원에게 “하늘나라 우선주에 대한 투자증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예수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세일즈맨’이라고 부른 건 당시의 시대상을 잘 표현한 셈이었다.

그런 사업만능 풍조 속에서 사교가 대성황을 누리면서 친목도모 단체들도 우후죽순 늘어났다. 1905년에 창립된 로터리클럽(Rotary Club)은 1930년에는 15만명의 회원과 44개국에 3천개가 넘는 클럽을 거느리게 되었다. 1917년에 만들어진 라이온스클럽(Lions Club)도 1920년대말에 클럽 수가 1,200개로 증가했다. 이들은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사업에 의한 구제’를 역설했다.

1929년 대공황은 그런 잔치판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 되었지만, 광고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어떻게 상품을 생산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상품을 소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튼이 할 일도 더욱 많아진 셈이었다. 그는 1937년에서 1940년까지 뉴욕주 공화당 하원의원을 지내면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대통령과 뉴딜정책의 비판자로 맹활약했다.

1930년대에 광고업계는 광고에 부정적인 뉴딜주의자들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바튼은 의회 활동을 통해 광고산업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그는 뉴딜이 광고를 파괴함으로써 언론을 파괴한다고 비난했다. 그런 일련의 비판 덕분에 바튼은 한때 공화당 대통령 후보감으로 거론되었고, 루스벨트는 바튼을 ‘뉴딜의 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렇게 적대관계였음에도 직업근성은 버릴 수 없었던 걸까? 바튼이 루스벨트를 칭찬한 건 딱 하나, 그건 바로 루스벨트가 대중을 향해 광고 언어로 말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스크립스-하워드(Scripps-Howard) 신문사 회장 로이 하워드(맨 왼쪽)과 그의 부인, 바튼(맨 오른쪽)과 그의 부인의 모습.


기업·상업 제일주의의 상징인가 진정어린 복음주의자인가

바튼은 1940년 상원의원 도전에 실패하면서 광고계로 복귀했다. 1942년 전쟁 분위기가 감돌면서 광고업계가 광고인 총회를 취소하려고 하자, 바튼은 “그렇게 하면 광고가 평화시의 사치일 뿐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라며 취소를 강력 반대하고 나섰다. 바튼이 옳았다. 광고업계는 그런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고 ‘전쟁광고위원회(War Advertising Council)’을 만들어 전쟁 프로파간다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광고업계가 정부에 기증한 광고의 시가는 1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런 애국적인 활동을 통해 광고업계는 사회적으로 굳건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전후 미국 광고의 성장은 눈이 부실 정도였고, 바튼은 광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업계를 대변해 반격을 가하곤 했다. 1958년 미국 광고비는 국민 1인당 62 달러에 이르렀다. 영국(18달러)과 프랑스(6달러)와 비교하면, 미국을 ‘광고 공화국’이라고 부를 만 하지 않은가.

역사가 윌리엄 로이히텐버그(William E. Leuchtenburg)는 바튼의 [아무도 모르는 남자]를 ‘종교의 세속화’이자 ‘기업의 종교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평가한다. 역사가 프레드릭 루이스 알렌(Frederick Lewis Allen)도 바튼의 책을 쿨리지 시대를 풍미했던 기업·상업 제일주의의 상징으로 묘사한다. 이런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바튼은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싸운 선전꾼 정도로 폄하되기도 한다.


1952년 <라이프> 매거진에 실린 [개정 표준 성경] 광고. 바튼의 캠페인 주도로 이 성경은 엄청나게 많이 팔리게 되었다. 바튼 지지자들은 묻는다. 선교와 광고의 결합,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출처: www.bible-researcher.com>


그러나 바튼이 맹목적으로 기업을 옹호한 것은 아니며, 1920년대 기업의 어떤 면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를 긍정 평가하려는 시각도 있다. 설사 바튼이 일방적으로 기업의 편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건 그 나름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는 해석도 따라 붙는다. 예컨대, 바튼은 주말을 길게 쉬고 노동을 고역으로 여기는 유럽의 게으름을 경멸했으며, 행여 미국이 유럽의 그런 점을 닮아갈까봐 걱정했다는 것이다.

이 시각에 따르자면, [아무도 모르는 남자]로 대변되는 바튼의 ‘복음 상업주의’도 방점은 ‘복음’에 찍혀져야 한다. 그의 신앙관과 방법론을 문제삼을 순 있을망정 그는 진정 종교와 광고의 합일화를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1950년대에 [개정 표준 성경(Revised Standard Version)]이 놀라울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팔렸는데, 이걸 가능케 한 건 바로 바튼이 주도한 광고 캠페인이었다. 선교와 광고의 결합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바튼 지지자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예수가 광고인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면, 기업 CEO들이 예수로부터 배울 게 왜 없겠는가? 오늘날에도 예수를 기업 CEO 리더십의 이상으로 여기는 책들이 많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런 책들은 예수를 ‘섬김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의 원조로 여기면서 “예수처럼 팀을 꾸려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거나 “모든 걸 버리고 따를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등의 처방을 제시한다.

1967년 바튼이 죽자 영국 저널리스트 앨리스테어 쿠크(Alistair Cooke, 1908-2004)는 바튼에게 ‘광고의 모세(Moses of advertising)’라는 타이틀을 헌납했다지만, 바튼은 더 넓은 맥락에서 광고가 미국 정신의 핵심임을 간파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미국은 유럽에서 사람을 끌어 들이기 위한 광고, 그것도 과대 광고에 의존해 건국된 나라가 아닌가. 역사가 대니얼 부어스틴(Daniel Boorstin, 1914-2004)이 잘 지적했듯이, 광고는 대표적인 ‘민주주의의 수사학’(rhetoric of democracy)이다. 설득의 문제가 지식의 문제를 압도하는 대중 민주주의, 그 본질이 바로 광고임을 바튼은 간파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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