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현대미술을 꽃피우게 한 결정적 기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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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을 꽃피우게 한 결정적 기여자

기사입력 2012.10.27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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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미술을 꽃피우게 한 결정적 기여자

독일군의 파리 입성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나돌자 파리 시민들은 서둘러 피란길에 나섰다.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애지중지하던 그림을 미술시장에 내놨다. 사설 미술관들도 서둘러 소장품 처분에 나섰다. 한창 주가를 올리던 피카소, 마그리트, 미로의 그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여간 바보가 아닌 다음에 전시에 그림을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 긴박한 순간에도 배짱 좋게 그림을 사 모으는 여인이 한 명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1898~1979)이라는 미국 여자였다. 이 여인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광산업으로 억만장자가 된 벤자민 구겐하임의 딸이었다. 벤자민은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에 승선했다 비명에 간 인물이었다. 페기는 졸지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젊은 나이에 2500만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아 재력가가 됐다.

그렇지만 돈과 행복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삶의 자극이 필요했던 그는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마르셀 뒤샹 등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사귀면서 보헤미안적 삶에 탐닉한다. 그는 여자 돈환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했다.

파리 체류를 계기로 예술에 눈 뜨게 된 그는 1938년 런던에 ‘젊은 구겐하임’이라는 화랑을 연다. 그러나 기획전 중심의 화랑 운영에 싫증이 난 페기는 미술사학자 허버트 리드의 조언을 받아 런던에 상설전시장을 갖춘 현대미술관 설립을 계획한다. 1939년 개관 기념전에 선보일 작품을 섭외하기 위해 파리로 간 그는 현지에서 2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접한다.

그러나 그의 눈에 이 위기는 기회로 비쳤다. 싼값에 명품들을 대거 소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에 한 작품씩 명품을 수집해 나갔다. 페기가 작품 수집을 멈추고 알프스 부근의 그르노블로 피란 간 것은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기 불과 이틀 전이었다. 그는 다시 지중해안의 마르세유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그는 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불법체류 외국인 작가와 유대인 작가들을 구명한다.

그가 초현실주의자로 명성을 누리고 있던 막스 에른스트(1891~1976)를 만난 것도 그곳에서였다. 독일 출신의 에른스트는 가짜 여권으로 프랑스에 불법체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적국의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제수용 위기에 처해 프랑스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때 페기가 손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페기의 호의가 반드시 순수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는 달리와 함께 초현실주의의 선두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이 매력적인 금발의 작가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당시 레오노라 캐링턴과 열애 중이었던 에른스트로서는 평범한 외모의 페기에게 여성적 매력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페기는 에른스트에게 집착했다. 그는 자신이 에른스트를 미국으로 망명시켜줄 것임을 암시했다. 에른스트도 결국 페기의 집요한 구애에 넘어가고 만다. 그로서는 무엇보다 전쟁터를 벗어나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작업할 공간이 필요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타협하고 만 것이다.

1941년 7월 페기는 에른스트를 비롯한 몇몇 작가들을 데리고 뉴욕으로 날아간다. 그는 에른스트와 뉴욕의 이스트 리버에 신접살림을 차리는 한편 이듬해엔 프랑스에서 수집한 작품들을 토대로 맨해튼에 ‘금세기 화랑’을 연다. 페기는 의욕적으로 신진 작가 발굴에 나서 잭슨 폴록, 로버트 마더웰 같은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들을 발굴해낸다. 그런 가운데 캐링턴이 나타나 가뜩이나 살얼음판 같은 부부관계에 위기감이 고조된다.

게다가 페기의 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에른스트를 절망시켰다. 페기는 매일 립스틱이 뭉개진 입술에 헝클어진 검정머리 몰골에다 방금 침대에서 뒹굴다 나온 듯 어수선한 복장으로 미술관에 나타났고, 밤에는 전위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5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광란의 파티를 벌였다.

견디다 못한 에른스트는 결혼 1년 만인 1943년 페기의 집을 뛰쳐나갔다. 그는 대신 도로시 테닝이라는 여성 화가에게서 위안을 얻었고 둘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페기의 충격은 컸다. 그 역시 에른스트에게서 구할 수 없었던 사랑의 갈증을 광란의 파티와 끊임없는 외도를 통해 분출했다. 그러나 광기는 또 다른 광기를 낳을 뿐 주린 욕망의 배를 채울 수는 없었다. 결국 페기는 미국을 떠나 베네치아에 정착, 그곳에 현대미술관을 설립해 30여년의 여생을 보낸다.

페기는 1979년 자신이 설립한 베네치아의 페기구겐하임미술관 정원에 자신이 사랑하던 애견과 함께 묻혔다. 오늘날 그는 현대 미술을 꽃피우게 한 결정적 기여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가 그의 후원 아래 화려한 꽃을 피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예술의 꽃이 욕망을 좇는 과정에서 화려하게 피어났다는 것은 기막힌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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