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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제국 4편의 메시지

기사입력 2012.12.22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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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제국 4편의 메시지

SBS에서 야심차게 방송한 최후의 제국 4편은 제국의 몰락을 분석하며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지극히 작은 섬 아누타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소개하면서 거대한 제국의 몰락을 막을 수 있는 해법을 찾고자 하였다.

아누타 섬(Anuta)은 솔로몬 제도 테모투 주의 섬이다. 폴리네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외딴 섬이다. 넨도 섬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km 떨어져 있다. 작은 화산섬으로, 산호초로 둘러쌓여 있다. 가장 높은 곳은 해발 65m이다. 아누타 섬의 인구는 약 300명이다. 동쪽의 "무아"와 서쪽의 "무리", 두 개의 마을로 이뤄져 있으며, 각 마을에 족장이 있다. 좁은 면적으로, 인구 밀도는 방글라데시만큼 높다. 섬의 지름이 2.5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솔로몬 제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족은 멜라네시아인이나, 아누타 섬의 주민은 폴리네시아인으로, 폴리네시아어군에 속하는 사모아어 계통의 아누타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누타 사회의 중요한 가치는 "아로파"(aropa)로, 협동과 공유, 타인에 대한 연민을 중요하게 여긴다. 아로파의 실천은 섬의 한정된 자원을 주민들이 공평하게 나누는데 기여한다.

아누타 섬의 높은 인구 밀도가 섬의 생태계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지 않아, 그 지속가능성에 대해 여러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BBC의 남태평양에 관한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는 아누타 섬의 풍요로움을 지키는 아누타족의 능력을 이스터 섬의 환경 파괴와 비교하여 방송하기도 했다.

최후의 제국4부에서는 솔로몬 제도 아누타섬과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 테네시주 이스트리지, 스페인 마드리드, 이탈리아 볼로냐 등을 돌아다니며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것과 대비하여 우리가 나아가야 할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은 솔로몬 제도에 있는 아누타 섬이었다. 여기에는 아로파(AROPA)라는 가치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누타 언어로 사랑, 연민, 동정, 나눔, 협동 등의 가치를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아누타섬은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공동체 의식이 강해서 출산이나 사망 등 경조사를 치른 사람들에게 음식을 같이 해주고 같이 돌보아 주면서 살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바이파라고 10살~12살 남자 아이가 처음으로 낚시를 하는 의식을 보여주는데, 아이의 처음 도전에 모든 사람이 자기일 처럼 도와주는 것이 인상깊었다.

그것과 대비한 곳은 미국의 앨라배마주 버밍햄이라는 곳이었다. 지자체가 파산한 도시라서 전기요금 수도요금이 살인적이었고, 주민의 대부분이 전기나 수도가 끊긴 상태였다. 일반 서민이 내는 전기요금이 한달에 97만원이 넘었고 수도요금은 35만원이나 되었다. 하루 종일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가정의 공공요금이 이러한데 일반 서민들이 어떻게 살림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 시청 공무원은 천명이 넘게 해고 되었으며 밤이 되면 전기요금이나 수도요금이 체납 된 가정을 찾아다니며 단전, 단수하는 불행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

또한 테네시주 이스트리지 라는 곳도 보여주는데 그곳은 무료 진료를 받기 위해 새벽같이 기다리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지금 미국의 민간의료보험료는 4인 가족 기준으로 월 150만원이라고 한다. 저소득층 가정에서는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형편이다.

또한 미국과 비슷한 상황으로 스페인의 마드리드가 나왔는데, 2000년대 외국자본이 들어와서 투기붐이 가득했고 빚이 빚을 만드는 상황으로 경제가 악화된 상황을 보여주었다. 특히 청년실업률도 60%가 넘었고, 빈 건물에 허가없이 살고 있는 OCUPA(불법점유자)청년들로 가득했다.

스페인과 비교하여 이탈리아 볼로냐가 등장했다. 볼로냐 시 1인당 GDP가 4만불이라고 하는데, 풍요로운 경제의 비결은 400개의 협동조합 덕분이라고 한다. 자본가가 주인이 아닌 일반 조합원이 협동조합을 통해 협동과 신뢰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기에 뜻깊었던 것 같다.

결국, 자본주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협동과 공존, 신뢰의 가치인것 같다.

▲ 촬영팀을 송별하는 마지막 장면



비극의 섬 이스터를 소개한다


칠레에서 3,6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이스터 섬이 있다. 밀림이 무성했던 그 섬의 족장들은 권력과 권위의 상징으로 모아이라는 석상을 경쟁적으로 세웠는데 그 크기가 3~12미터가 되고 무게가 20톤에 이른다고 한다. 석상은 점점 커져서 50톤에 이르는 것도 발견되었다.

아누타와 대조적으로 이스터섬은 그 크기가 수십 배에 달하는 매우 크고 아름다우며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이제 그 어떤 사람도 살지 않는 무인도이다. 이스터섬의 사람들은 풍요가 가져다 주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그들은 소비했다. 나무를 베어 모아이라는 석상을 만들기 위해 사용했으며 서로 자신이 가진 권력을 자랑하고자 석상은 늘어났고 자연은 파괴되었다.

숲이 없는 이곳에 벌들이 날아오지 않았고 곤충들이 사라졌으며 새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무가 없어 카누를 만들지 못했고 그로인해 물고기 사냥도 힘들어졌다. 땅은 척박해 졌으며 사람들은 살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섬은 파괴 되었고 이제는 황무한 섬이 되었다.

내전기에 인구 감소가 시작되었는데, 그 후 백인과 접촉한 후, 도민은 페루의 인광석 채굴을 위한 노예사냥의 대상이 되고, 천연두나 폐결핵이 만연해서 인구가 격감하여 1877년에는 최저 111명이 되었다. 그 결과 문화의 전승이 끊기고, 이 섬이 수수께끼의 문화지가 된 것이다. 현재의 도민은 백인, 타히티 도민, 중국인 등과의 혼혈이 대부분으로, 순수한 폴리네시아인은 거의 없다.

아누타 섬도 몇 백 년 전에는 개인주의, 파괴주의가 득세하여 전쟁이 치열하여 4명 정도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멸망직전에 아로파의 정신을 깨닫고 서로 협동, 나눔, 공존의 길을 선택하여 지금의 낙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스터는 인구 약 2천(1990). 원지어(原地語)로는 라파누이(Rapa Nui), 에스파냐어로는 파스쿠아(Pascua)라고도 한다. 네덜란드 탐험가인 J.로게벤이 1722년 부활절(Easter day)에 상륙한 데서 이스터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20개 가까운 화구가 있는 화산섬으로서 거의 삼각형이다. 토지의 대부분은 칠레 정부가 소유하며, 양과 소의 방목에 이용되고 있다. 수목은 없고 초원이며, 물은 적은 편이다.

고고학상 중요한 섬으로서, 인면석상(人面石像) 등의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유적과 폴리네시아 유일의 문자가 남겨져 있으나, 이것들을 만든 사람들에 대하여는 명확하지 않다. 이 섬으로의 이주는 10세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며, 언어 ·인류학상으로 보아 최초의 주민은 멜라네시아의 피가 섞인 폴리네시아인으로 본다. 1722년 이전에는 최고 4,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나, 1862년의 노예사냥과, 그에 잇달은 천연두의 유행 등으로 섬의 인구는 최저 111명까지 감소되었다. 1864년 이후에 백인도 정착하게 되고 1888년에 칠레령이 되었다.

현재 서해안의 약 20㎢의 토지는 원주민(토민)들의 보호지로 되어 있다. 가장 주요한 유적은 아후라고 하는 돌로 쌓은 대좌(臺座)와 인면석상이다. 아후는 260여 개가 있으며, 몇 개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바다가 보이는 절벽 등, 해안을 따라 축조되어 있고, 단속적으로 섬을 일주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전형적인 아후 하나는 길이 45m, 너비 2.7m, 높이 2.4m에 달하는 것으로서 최대 6t의 돌로 쌓아 만들어졌다. 아후는 조상의 영혼을 모시는 성스러운 장소였다고 생각된다.

이스터섬의 상징으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면석상은 약 550개 있으며, 높이 1~30m에 이르는 거대한 것으로서, 대개는 해안을 따라 놓여졌고, 원래는 아후 위에 세워졌던 경우가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치밀한 응회암(凝灰岩)으로 만들어진 긴 귀, 뚫려 있는 코를 가진 머리와 어깨만의 상으로서, 형태는 거의 비슷하다. 이전에는 머리에 크고 늙은 장식의 돌을 얹어 놓은 것이 많았으나 지금은 무너져 있다. 인면석상은 라노라라크라는 화산에서 잘라내어 운반된 것으로 채석장 옆으로 뚫린 굴 속에는 지금도 돌을 떠내다만 상(像)이 남아 있다. 그것들을 근거로 하여 인면석상은 옆으로 눕힌 형으로 조각되어 최후에 등 부분이 잘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섬에는 그 밖에도 석기나, 폴리네시아에서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돌만으로 지은 집, 아름다운 그림문자를 새긴 목판 등이 발견되었다. 노르웨이의 인류학자 헤이에르달은 이 거석문화를 이룩한 사람들은 원주민과 다른 페루에서 온 인종일 것이라는 설을 세워 《아쿠아쿠》라는 책을 펴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러한 거석상 제작에 필요한 목재나 로프로 쓸 만한 재료는 물론 돌을 운반할 동물도 없었기 때문에 섬 주민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위에 많은 거석상들이 쓰러져 있는 이유도 불가사의하였다. 이를 밝히려는 고고학 및 고생물학의 연구 조사 결과 최초의 원주민이 거주한 연대는 400~700년으로 나타났으며, 거석상은 1200~1500년에 조각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당시 원주민의 숫자는 7천 명~2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운반에 필요한 목재에 관한 연구는 화분(花粉) 분석을 통하여 해결되었다. 늪지나 못의 바닥에서 수직으로 잘라낸 잔해물층에 있는 수천 가지의 화분을 일일이 분석한 결과 이 섬에는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30만 년 이전부터 아열대수림이 우거졌음이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칠레산 와인 야자수 화분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직경 6피트에 높이 82피트나 되는 이 야자수는 거석상을 운반하거나 카누를 만드는 데 안성맞춤의 목재이다. 주민들은 이 야자수로 만든 대형 카누를 타고 바다로 나가 고래를 포획하였음이 돌고래뼈 화석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그 밖에 올빼미·왜가리·앵무새·뜸부기 등 6가지 조류와 들쥐의 화석도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이들 화석과 함께 화분층에서 숯덩이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아열대수림에 대화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증가한 인구로 많은 나무가 벌채되고, 야자수는 1400년경에는 사라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숲이 사라짐에 따라 토양도 황폐해져,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종족간의 분규가 일어났으며, 그들은 경쟁 상대 부족의 거석상을 쓰러뜨리거나 거석상의 머리를 부수는 방법으로 증오심을 표현하였다. 현재 칠레 정부의 의뢰로 유네스코가 유적보존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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