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불멸의 야구인 최동원 그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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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야구인 최동원 그가 옳았다

기사입력 2011.09.15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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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이전에 최동원이 있었고, 최동원 때문에 야구가 있었다. 실제로 한국에선 그랬던 시절이 존재했고, 그 세월을 함께 한 이들이 지금은 사회의 중심으로 성장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한때 올드 스포츠’로 존재감이 희박해지던 야구를 줄곧 지킨 이들이다.

최동원은 한국 야구사에서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는 야구공을 잡은 이래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대기록을 세워왔고, 한국 야구선수 가운데 최초로 미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뻔했다. 프로에서도 그의 대기록은 이어졌다. 하지만, 최동원이 진정으로 재평가받아야 할 점은 그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음에도 야구인들의 권익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싸우고, 음지에서 고통받는 무명선수들의 아픔을 공유했다는 점이다.

대스타 출신임에도 야구계를 기웃거리지 않고, 리틀야구와 사회인 야구 발전에 헌신하며 마지막까지 야구인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은 것도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나 무늬만 프로야구였던 엄혹한 시절에 진정한 프로야구 선수상(像)을 정립한 것이야말로 그의 최대 업적이었다.

그러나 생전 최동원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무명선수들의 아픔을 함께하려 한 그의 노력은 '불순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고, 야구인들의 권익을 지키려 선수회를 조직할 땐 '강성'이란 지적을 들어야 했다. 대스타의 자존심을 지키려 야구계를 떠났을 때도 그는 좋은 소리 대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 성격 때문에 야구판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오해를 샀다. 그가 고향 부산에서 마지막 생을 불태우지 못한 것도 어쩌면 수많은 오해와 왜곡된 이미지 탓이 컸다.

최동원이 떠난 지금. <스포츠춘추>는 최동원과의 수차례 인터뷰를 반추하며 그를 회고하고자 한다. 이 회고를 통해 그가 과연 불순하고 강성인 자기밖에 모르던 야구인인지 되짚고자 한다. 그것이 우리가 '불멸의 최동원'이라 부르는 그에 대한 마지막 예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84년 가을의 전설, 최동원

2006년 가을, 한화 투수코치로 있던 최동원을 만났다. 그것이 <스포츠춘추>와 최동원의 첫 번째 인터뷰이자, 이후 수차례의 인터뷰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인터뷰였다. 최동원은 인터뷰 내내 "지금껏 살아오며 1984년처럼 행복한 때는 없었다. 만약 타임머신을 탄다면 나는 언제나 '1984'에 시계를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야구팬에게 큰 감동을 안겼던 1984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최동원 자신에게도 가장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던 것이다.


이제 포스트 시즌도 얼마 남지 않았다. 1984년 한국시리즈는 역대 최고의 포스트 시즌 명승부로 꼽힌다. 혼자 4승을 거두며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작은 탄성이 흘러나오며) 4승이라, 정말 대단하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영광스러운 추억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팀과 팬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이상의 노력을 다한 것 같아 늘 기억에 남는다.

당시 삼성이 롯데에 져주기 경기를 하면서까지 한국시리즈 상대팀으로 롯데를 선택하지 않았나.

그때는 우리(롯데)보다 삼성이 전력이나 성적에서 우위에 있었다. 열 번을 싸운다 치면 우리가 아홉 번 지고 고작 한번 이길 정도의 승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삼성이 롯데를 선택한 게 이해가 되긴 한다. 당시 삼성과 OB는 매끄럽지 못한 사이였다. 삼성으로서는 OB가 껄끄러운 상대이다 보니까 맞붙기 싫었던 것 같다. 조금 편안하게 우승했으면 하는 마음이 삼성 측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롯데 선수단에는 일종의 굴욕일 수도 있었는데

자극제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너희가 그랬다. 이거지. 좋아, 어디 해보자’하는 생각이 선수단 사이에 흘렀다.

삼성이 당신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을 텐데.

그래도 ‘우리가 삼성인데 최동원 하나 못 깰까’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웃음).

당시 롯데 코칭스태프가 당신에게 주문한 것은 무엇이었나.

처음에 선수단이 모여 회의를 하는데 코칭스태프에서 나보고 1, 3, 5, 7차전을 준비하라고 하더라. “너무 무리 아닙니까?”하고 강병철 감독님께 말씀드렸더니 곰곰이 생각하시다 뭐라고 말씀하셨다.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아나?

투구일정을 재조정해 주겠다고 하던가.

(고개를 흔들며) 아니다. 무척 미안한 표정으로 “동원아,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 하시는 거다. 그래서 두말할 것도 없이 감독님께 “네, 알았심더. 한번 해보입시더”하고 대답하고는 그 길로 바로 등판을 준비했다.

1차전부터 6차전까지 당신의 활약이 없었다면 마지막 7차전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아직도 그때 상황이 눈에 선하다. 일단 1차전에 나가 완봉승을 거뒀다. 그리고 3차전에 나가 삼진 12개를 기록하며 또 승리를 따냈다. 5차전도 계획대로 등판했는데 정현발에게 홈런을 내주며 아깝게 졌다. 이제 7차전에 나올 차례였다. 하지만, 6차전에서 4회부터 투입됐다. 힘이 들고 팔이 빠질 것 같아도 팀과 팬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결국, 운이 좋아 6차전 승리를 따냈다.

운명의 7차전을 앞두고 어떤 각오를 했나.

마지막 7차전을 앞두고 선수단이 모두 식당에 모였다. “야,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만도 어디냐. 우리는 전력의 100% 이상을 발휘했다”라며 선수들끼리 격려하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후회도 없고 부담도 삼성보다 훨씬 적은 상태였다.

지금도 당신이 7차전 마지막 타자였던 삼성 장태수를 삼진으로 잡고 펄쩍 뛰던 장면이 어제 일처럼 생각난다.

7차전 초반에 내가 실투를 좀 했다. 6회인가 오대석에게 홈런을 맞는데 ‘아, 오늘은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야구는 투수 비중이 커도 결코 투수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었다. 우리 팀의 타자들이 점수를 뽑고 수비수들이 몸을 날려 타구를 잡았다. 결국, 유두열 선배가 역전 홈런을 때려 나와 팀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우승을 안겨줬다.

당신이야말로 7차전까지 혹사를 거듭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우승컵을 안았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가.

경기가 끝났을 때는 먼저 ‘오늘도 무사히 끝났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과거에 내가 그런 인터뷰를 했었다. 지금도 그 기사를 보면 피식 웃곤 하는데 당시 기자가 “지금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게 뭡니까”하고 물었을 때 내가 “자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어지면서 몸이 착 가라앉았다. 어느 정도 기력이 돌아왔을 때 무슨 생각이 들든지 아는가.

글쎄.

(조용히 웃으며) ‘이제 뭐하지?’ 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많이 뒤진 롯데가 삼성을 이긴 원동력이 무엇이었다고 보는가.

단기전과 장기전의 차이라고나 할까. 한 경기에 승부가 갈리는 단기전은 내일을 위한 준비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오늘, 오늘, 오늘로 결판이 나기 때문에 팀 분위기나 선수들의 의지에 따라 결과가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팀이 정신력과 투지에서 삼성보다 강했던 것 같다.

당시 거의 전 경기에 출전했다. 특별히 힘들었던 타자가 있었나.

상대 타자는 모두 어려웠다. 속마음을 모르는 분들이 그때 “당신 같은 투수라면 타자들을 쉽게 상대하겠지?”하고 묻기도 했는데, 절대 쉽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지나친 겸손이 아닌가.

이건 품성의 문제가 아니라 투수 철학의 문제다. 내가 쉽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지게 돼 있다. 왜냐하면, 상대를 쉽게 생각하면 결국 나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잊기 때문이다. 과욕과 자만은 그때부터 비롯되는 거다.

한편으로 그렇게까지 혹사하며 우승에 목을 맬 이유가 있었겠는가 싶다.

무리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승은 나 혼자만의 영광이 아니라 팀과 팬들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고생을 하면서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왔는데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번 오는 기회도 아니고. 만약 내가 무리를 이유로 팀의 대열에서 빠졌다면 과연 우리 팀이 어떻게 됐고, 팬들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럴 때마다 비록 선수생명이 짧아지는 이유가 되긴 했지만(잠시 긴 숨을 내쉬다) 잘했다는 생각이 앞선다.

당신을 가리켜 철완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후유증이 왔을 텐데.

물론 이상이 찾아왔다.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사람의 몸이라는 게 계속 움직일수록 강화되기도 하고 기계처럼 닳기도 하지만 무리는 역시 강화보다는 닳는 쪽에 가깝다. 무리는 역시 대가가 있게 마련이더라. 그러나 후회한 적은 없다. 다시 그날로 돌아가도 난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던질 거다. 왜냐? 그게 최동원이니까.

- 2006년 7월 인터뷰 -

1984년의 최동원은 '혹사'가 맞았다. 혹사도 그런 혹사가 없었다. 1984년 우승이라는 목표 아래 후반기 50경기에서 무려 31번이나 마운드 위에 올랐다. 한국시리즈도 혼자 던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프로에서 롱런하지 못했다. 누구보다 최동원 자신이 잘 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옳았다. 1984년은 그의 선수생활을 단축하는 단초를 제공했지만, 한국 프로야구사에 '불멸의 최동원'을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출범 3년째의 프로야구가 전 국민의 스포츠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84년 최동원의 호투가 없었다면. 당신은 야구를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양지에 있었으나 음지를 주목했던 야구인

생전 최동원의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건 '최고 투수'라는 영예만이 아니었다. 되레 그는 '강성 야구인'이란 이미지 때문에 오랫동안 야구계 밖을 떠돌아야 했다. 1988년 그가 주도했던 프로야구선수회의 기억 때문이었다.

최동원은 <스포츠춘추>를 볼 때마다 선수회 결성 의도가 전혀 불순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1988년 선수들의 평균연봉이 6백만 원에 불과했다. 2군 선수들은 제대로 식사조차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야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가능한 음지에 있는 선수들의 복지와 권익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싶었다. 다른 선수들보다 내가 그들의 고충을 이야기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여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최동원이 2군 선수들을 이용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한다'는 비난이었다.”

최고 연봉의 선수가 최저 연봉의 2군 선수들의 처우에 주목했다는 것만으로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최동원은 단번에 '불순한 의도로 선수들을 조종하려는 강성 야구인'으로 둔갑했고, 그해 시즌이 끝나고서 롯데를 떠나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결국, 목숨과도 같았던 롯데에 배신당한 최동원은 1990년 삼성 유니폼을 벗고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나이 32살. 지금으로 따진다면 그는 은퇴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활동할 시기였다.


최 감독님은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투구했습니다. 그러면서 1983년 데뷔 해를 제외하고 꼬박 14승 이상씩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1988년 11월 삼성 투수 김시진과 맞트레이드되면서 롯데 유니폼을 벗어야 했습니다. 당시 스포츠 신문을 보며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한데요.

트레이드가 발표되던 날 새벽이었어요. 어느 기자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어. “이 새벽에 웬일입니까”했더니 “삼성, 롯데 구단 대표가 만나서 최동원 선수 트레이드에 합의했다고 하는데 모르십니까”하는 거에요. “난 잘 모르고 오늘 훈련이 오전 10시30분부터 시작하니까 일단 구장에 나가서 알아보겠습니다”했어요. 구장에 나가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구단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어요. “올라오라”고. 갔더니 프런트 관계자분들이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사정이 이래이래해 결국, 트레이드가 됐습니다”하는 거예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하고 악수하고 바로 나왔어요.

심경이 복잡하셨겠습니다.

그분들은 내가 미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잖아. 중간관리자분들이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구단 사무실에 나와서는 “이런 식의 풍토에선 야구를 못하겠다”고 하고, 삼성에 연락해서 “감사하지만 못 갈 것 같습니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 길로 미국에 가버렸지. 그것 때문에 삼성 단장님이 참 인간적으로 고마운 분인데, 고생을 좀 하셨어요.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1989년 삼성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그러긴 했죠. 미국에 있으면서도 선배님들하고 통화를 많이 했어요. 선배님들은 “프로야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나 큰 흠집이 될 수도 있다. 되도록 흠집 남기지 말고, 무난하게 넘어갔으면 좋겠다.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라”고 조언해주셨어요. 생각해보니까 조용히 있다가 야구를 그만두는 게 전체 프로야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좋겠더라고. 그래 1989년 후반기에 삼성 유니폼을 입었어요. 하지만, 그땐 난 이미 야구를 포기한 상태고, 반년 간 쉬었기 때문에 몸이 정상이 아니었어요.

삼성에서 “1년만 더하자”해서 했는데, 이듬해 6승5패인가 했어요. 이젠 안 되겠더라고. 당시 김성근 감독님이 삼성 사령탑이었는데, 1년만 내가 더 뛰길 원하셨어요. 하지만, 제가 “은퇴할 수 있게끔 도와주십시오. 저 유니폼 벗겠습니다”하고 간청을 드렸어요. 나중에 김 감독님께서도 “알겠다. 그렇게 하자”해서 1990시즌 끝나고 조용히 은퇴를 하게 된 거예요.

- 2011년 7월 22일 인터뷰 -

사실 최동원이 선수회를 결성하려고 마음먹은 건 구단들의 고압적인 자세에 선수들의 목소리가 철저히 묵살댔기 때문이었다. 자신이야말로 대표적인 예였다. 최동원은 1983년 롯데에 입단하고서 1987년까지 5년 연속 200이닝을 던지며 롯데 마운드를 이끌었지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연봉 협상 때면 늘 구단과 충돌했고, 일부 야구인으로부터 '팀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선수'라고 지탄받았다. 그러나 최동원이 지탄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는 객관적인 성적에 따른 상식적인 연봉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특히나 최동원은 아버지 최윤식(작고) 씨 때문에 많은 공격을 받아야 했다.

상이용사 출신의 최 씨는 최동원이 대투수가 되기까지 최대 공로자였다. 최동원이 야구공을 손에 쥔 순간부터 최 씨는 아들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최동원이 경남고 재학 때 당시로선 생소한 팔 보험을 든 것도 최 씨의 결정이었고, 연세대 시절 구타 파동으로 선수생활을 그만두려 할 때 아들의 손목을 잡고, 다시 야구장으로 인도한 이도 아버지 최 씨였다.

프로에서도 최 씨는 아들이 야구에만 몰두하도록 대리인 역할을 자임했다. 하지만, 그런 최 씨를 두고 야구계는 '극성 아버지', '최동원의 앞길을 망치는 장본인'이라고 비난하곤 했다.

그래서일까. 최동원은 작고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가슴을 치며 울분을 토하곤 했다.


아버지 최윤식 씨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오늘의 최동원이 있기까지 모든 걸 희생하신 분이에요. 프로야구에 들어왔을 때 주변에서 그러더군요. "최동원은 파파 보이"라고요. 하지만, 제가 전적으로 아버지의 입김에 좌우됐다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아버지는 제게 조언만 해주시고, 모든 결정을 제가 내리게끔 하셨어요.

그런데 어째서 아버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컸던 걸까요.

아버지는 일찍부터 일본 프로야구를 접하셨어요. 독학으로 공부하신 거죠. 야구기술뿐만 아니라 트레이닝, 훈련법, 언론 접촉 등 당시로써는 생소한 선수 매니지먼트를 공부하셨어요. 아버지는 "선수는 운동에만 전념해야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강조하셨어요. 대신 "매니지먼트는 본인이 하겠다"고 하셨어요. 당신께서 방패가 되겠다는 뜻이셨죠. 만약 아버지가 절 매니지먼트 해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계속 야구계 사람들한테 이용당했을 겁니다. 아버지가 제 뒤를 봐주셨음에도 수없이 많은 이용을 당했으니까요.

어찌 보면 메이저리그의 에이전트 역할을 아버지께서 대신해줬다고 볼 수 있겠군요.

맞아요. 근래 일본 프로야구에서 대리인 제도를 뒀다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늘 그랬어요.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대리인 제도가 있어야 선수들이 더 많은 권익을 찾고, 더 정열적으로 운동에만 몰두할 수 있다"고요. 돌아보면 그런 아버지가 구단 입장에선 좋아 보일 리 없었을 거예요. 구단 입장만을 전달하던 야구계와 언론도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 2007년 4월 인터뷰 -

누구보다 롯데를 사랑하고, 그리워하셨습니다. 하지만, 감독님과 롯데는 언제나 '가깝고도 먼 사이'였습니다. 언제부터 롯데와 애증의 관계가 되신 건지 궁금합니다.

이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언젠간 다 밝혀질 거예요.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1981년 실업 롯데에 입단하기로 합의를 했어요. 애초 5천만원을 약속했지만, 1981년 2월 28일 입단에 합의할 때 2천100만 원을 받고, 나머지 2천900만 원은 6개월짜리 약속어음으로 받았어요. (얼굴이 어두워지며) 하지만, 끝내 2천900만 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롯데는 처음부터 나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이런 상태에서 프로 롯데라고 믿음이 갔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롯데를 위해 1984년을 통째로 바쳤어요.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대가가.

- 2010년 1월 인터뷰 -

 ‘최동원’이란 이름이 전국에 알려진 계기가 있습니다. 바로 1974년 경남고에 입학하자마자 당시나 지금이나 매우 생소한 ‘팔 보험’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사에 보면 어깨나 팔꿈치 혹은 손목 장애 시 50만 원을 보험금으로 받기로 하고, 달마다 3천410 원을 보험료로 내기로 했는데요. 특별히 보험에 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아직 어리지만, 몸이 중요하단 생각을 했어요. 부모님도 “보험 혜택보다는 스스로 몸 관리에 신경 쓰게 하려는 교육적 차원에서 (보험에)들었다”고 하셨고요. 당시로선 꽤 파격적인 일이라, 언론에서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30년이 더 지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야구사에 보면 최 감독님이 연대 시절 선배들의 구타 때문에 급기야 무단이탈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당시 최 감독님은 무단이탈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야구인들도 상당수입니다. 무엇이 진실입니까.

(잠시 침묵하다가) 야구라는 게 개인 운동이 아니거든. 단체운동이다 보니까 모든 게 단체생활로 간다고. 경기 지고 왔다, 연습 중 목소리가 작다. 선배님들 기분이 나쁘다 싶으면 그때는 속으로 ‘오늘도 죽었구나’했다고. 아니나다를까 선배들이 그런다고. “다 지하실로 집합하라”고. 그러면 기합도 받고, 엉덩이도 얻어맞고 그랬어요.

1979년 3월 21일 대통령기쟁탈 대학야구대회 준결승에서 동국대에 2대 4로 진 뒤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랬지. 내가 대학 3학년 때였어요. 3학년이면 중고참인데. 그날은 박철순 선배가 먼저 등판해 2실점하고, 내가 4회인가 등판해서 2점을 줘서 졌어요. 그날 경기에 지고 4학년 선배들이 집합을 지시했는데, 그때 누구보고 배트를 잡으라고 했느냐. 박 선배였어요. 물론 박 선배가 내보다 나이는 2살이 많았어요. 하지만, 난 3학년이고, 박 선배는 군대를 먼저 갔다 온 통에 2학년이었다고. 속으로 ‘이건 아닌데’싶었지.

그날 박 선배도 악역을 맡은 거지. 엉덩이를 10대 맞았는데, 뭘 잘못 맞은 건지 허리 쪽에서 피가 나오더라고. 집에 가서도 잠을 못 자고, ‘낑낑’하는데, 작은아버지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방문을 열고 들어오신 거야. ‘혹시나’해서 이불을 드니까 팬티가 다 피범벅인 거야. 당시 아버지가 부산에 계셨는데, 바로 올라오셨지.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 갔는데, 2주 상해진단서를 끊어주더라고. 그걸 들고 그때 총장실로 찾아갔어요.

음.

총장님한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어요.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묻더라고. 아버지가 “좀 쉬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총장님이 “그렇게 하시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총장실을 나와서 감독님한테도 사정을 말씀드렸지. 그래놓고 난 부산으로 간 거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 그런데 나중에 학교 측이 돌변한 거야. “최동원이 무단이탈을 했느니, 그렇게 아프지도 않은데 아직 돌아오고 있지 않다‘는 둥 말이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나로서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

학교 측에 강하게 항의를 하지 그랬습니까.

“이건 분명히 무단이탈이 아닌데, 왜 그렇게 몰고 가느냐”고 학교 측에 따졌지. 내가 막 따지니까 “기자들이 그렇게 쓴 것”이라고 하더라고. “아니, 기자들이 없는 말 지어냈겠느냐”고 다시 따지니까 별말 하지 못하더라고.

그해 7월, 3개월 만에 다시 연세대로 돌아와 연·고전에 출전했습니다.

그때 스피드 건에 시속 140km가 찍혔어요. 사람들이 “최동원이 돌아왔다”고 좋아하고 그랬던 게 기억나요.

공교롭게 가해자가 돼야 했던 박철순도 그해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입단하며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것도 사실 못 갈 뻔했어요. 왜? 대학 재학생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서류를 떼 줘야 했거든요. 총장실에서 또 내랑 아버지와 총장님이랑 얼굴을 맞댔어요. 총장님이 “(박)철순이를 어떻게 할까요. 보내지 말까요?”하시더라고요. 그때 아버지가 “보내줍시다. 나도 자식 키우게 아비 입장인데, 그게 기회라면 기회인데 보내서 잘할 수 있게끔 기회를 줍시다”하셨어요. 그래 박 선배가 서류를 다 준비해서 미국으로 갈 수 있던 거예요.

최 감독님은 항상 가장 마지막에 연봉협상을 끝마쳤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늦게 끝낸 게 아니라 (구단에서) 매일 늦게 불러요. 제일 늦게 불러놓고 구단 사무실에 들어가면 이해 못 할 이야기만 늘어놓곤 했어요.

주로 어떤 식이었습니까.

주먹구구식도 그런 주먹구구식이 없어요. 구단 고위층의 첫마디가 뭐냐면 이거에요. “그래도 최동원이 팀의 에이스인데 20승은 기본 아닙니까.”

나도 그랬다고. “20승이 에이스의 기본이라고 하시는데, 그게 어디서 나온 말씀입니까.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는 보십니까. 팀의 에이스면 20승이 기본이라니요? 그게 어디 시대의 야구입니까”라고 말이지.

나는 연봉협상 테이블에 앉을 때 내가 조사한 걸 다 제출한다고. 내가 선발로 등판했을 때 관중동원력부터 해서 아주 꼼꼼하게 자료를 준비해 내민다고. 그러면 뭐라는 줄 알아요? “에이, 이게 무슨 필요 있어. 우리가 무슨 프로야. 말만 프로지 아직 세미프로잖아” 이래 대꾸하는 거야. 그러다 자기 말이 안 먹히면 또 그런다고. “야, 선·후배끼리 앉았는데 좋은 게 좋은 거지. 빨리 끝내자”고 말이지.

공·사 구분이 전혀 되지 않던 시절이었네요.

나도 그리 이야기했지 “나는 그렇게 말씀하는 그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오신 분은 구단 대표로 나오신 게 아니냐. 나도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대표로 이 자리에 나왔다. 서로 대표끼리 만났는데, 그런 식의 언행은 잘못된 거다.” 이래 막 따졌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런데 그러고 나면 꼭 밤에 이상한 일이 만들어지는 거야.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 듯합니다.

난데없이 이상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와. ‘최동원이 계약하러 왔는데 되도 않는 억지를 부렸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혼자서만 뭘 바란다’ 등등 말이지. 내가 입도 뻥긋하지 않는 이야기부터 별의별 이상한 소리가 다 나온다고. 팀 간판선수의 이미지는 생각지도 않는 거지. 지금도 그런 점이 억울하긴 해요. 나도 모르는 이유로 팬들이 날 보는 시각이 바뀌었으니까.

- 2011년 7월 22일 -

이것 역시 최동원이 옳았다. '대리인 제도의 도입'을 염원했던 최 씨의 바람은 2000년이 넘어서야 실현됐다. 2001년 3월9일 공정거래위원회는 대리인제도에 미온적인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시정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KBO는 야구규약 제30조 대면계약에 '선수가 대리인을 통하여 계약을 체결하고자 하는 경우는 변호사법 소정의 변호사만을 대리인으로 하여야 하며…(이하 중략)선수계약에 관여하는 변호사는 2명 이상의 선수를 위하여 선수계약에 관여할 수 없다'는 조항을 명시했다.

물론 야구규약에 대리인 제도가 명시됐지만, 아직 시행되진 않고 있다. 조항 맨 밑에 '대리인제도의 시행일은 부칙에 따로 정한다'는 단서가 10년이 넘도록 제자리를 지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10구단 체재를 눈앞에 둔 한국 프로야구는 질적 성장을 준비하고 있다. 많은 야구인은 조만간 대리인 제도가 시행될 것으로 본다.

최동원이 바랐던 상식적인 연봉 인상률도 25% 연봉 상한선 제도가 폐지되며 어느 정도 실현됐다. 연봉협상 테이블에서 구단이 선수 측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일도 많이 줄었다.

프로야구 선수가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자 보험에 드는 것도 이젠 일상이 됐다. 무엇보다 최동원이 그토록 열망하던 선수들의 결사체인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조직된 지 오래다. 최동원이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선수였다면 차후에도 선수협은 결성되지 못했고, 선수들의 정당한 권익 주장은 지금도 '불순한 목소리'로 폄훼되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롯데와 부산, 그리고 팬은 어떤 존재였을까

최동원은 자존심이 강한 야구인이었다. 스스로 "자존심 빼면 시체였다"고 말할 정도다. 그런 그였기에 고향팀 롯데로 돌아가려 수를 쓰지 않았다. 되레 먼발치서 그리운 마음으로 고향팀 롯데와 고향 부산을 바라봤다. 그에게 과연 롯데와 부산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그에게 팬은 어떤 존재였을까.


당신에게 부산은 어떤 곳인가.

차를 몰고 부산 요금소에 들어서면 기분이 참 묘하다. 따뜻한 촉감의 무언가가 몸을 감싸는 기분이 느껴진다. 그러면 속으로 ‘이게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고향집에 찾아가 어머니를 뵙고 나를 기억하는 고향 팬들과 만나면 늘 뿌듯하고 고마운 마음이 생긴다.

올해로 한화와의 코치계약이 끝난다. 당신을 기다리는 부산, 경남 팬들이 많은데.

부산, 경남에서 내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롯데를 비롯한 부산, 경남지역에서 코칭스태프 제의는 있었는가.

(담담한 음성으로) 아직 없었다.

롯데에서 코칭스태프 제의가 와도 당신이 가지 않겠다고 했다던데.

그런 오해가 많더라.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여러 가지 오해가 퍼져 있는 것 같다. 부산, 경남은 내게는 뿌리고 지금도 어머니가 계신 곳이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1990년 은퇴할 때까지 줄곧 나를 아껴주시던 팬들이 있는 곳인데, 내가 그런 고집을 피울 리 있겠는가. 오히려 고향 팬들에게 인사드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롯데에 대한 섭섭함이 남아 있지 않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다 옛날이야기다.

만약 롯데에서 지도자 제의가 온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지 궁금하다.

음. (입술을 깨물며) 나야 정말 고마운 일 아닌가. 언제든지 그런 기회만 준다면 가야 한다는 마음이다. 물론 억지로 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도 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금테 안경만은 그대로인 듯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금테 안경을 쓰고 다녔다. 사실 안경이 편하진 않다. 선수 시절 여름에 경기하면 땀이나 빗물 때문에 타자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불편한데 어째서 지금껏 금테 안경을 고집하나.

불편하지만 최동원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팬들은 언제나 ‘금테 안경 최동원’을 연상하시기 때문이다. 조금 불편해도 팬들을 위해서 그것을 감내하고 넘어가는 것이 진정한 프로이자 영원한 야구인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 2006년 7월 인터뷰 -

최동원은 생애 마지막까지 현장 복귀를 꿈꿨다. 가끔 그와 통화를 하다 보면 현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입 밖으로 "감독을 맡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그는 프로야구 감독보단 리틀야구와 사회인 야구 활성화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다.

지난해 1월 ‘MBC SPORTS ’의 유소년 야구프로그램 '날려라! 홈런왕'에 출연한 것도 그 때문이었고, 지난 8월 6일부터 고양구장에서 열린 전국사회인야구대회 ‘하이트볼’에 멘토로 참석한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최 감독님은 한화 2군 감독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그 이후엔, 야인으로 살고 계신데요. 마지막 지도자 경험에 대한 회한이 남다를 듯합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후회? 나는 없어요. 후회한다고 해봐야 돌이킬 수도 없고, 후회를 마음에 담아두고 살 이유도 없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뭐 굳이 후회라면 날 버릴 팀을 위해 내가 왜 몸을 바쳤을까 하는 정도예요. 하지만, 그것도 이젠 다 잊었습니다. 전부다….

감독님께서 요즘 사회인 야구 발전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합니다.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레전드들이 양지보다 음지에 더 집중한다는 게 무척 고무적인데요. 사회인 야구에 관심을 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야구인으로서 ‘야구 붐’은 반가운 일이에요. 반가운데 ‘과연 이러한 흐름이 언제까지 지속할까’하는 걱정이 있어요.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목표 관중을 660만 명으로 잡았다는데, 그 정도면 5천만 인구 가운데 10% 이상이 야구장을 찾는다는 뜻이에요. 대단하죠. 문제는 이 많은 관중이 언제까지 야구장을 찾겠느냐는 거예요. 계속 관중을 붙잡아두려면 팬을 생각하는 야구를 해야 합니다. 선수들도 더 책임감을 느껴야 해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은퇴는 했지만, 한번 야구인은 영원한 야구인이에요. 그래서 사회인 야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하는 게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 2011년 7월 인터뷰 -

최동원은 늘 마운드를 그리워했다. 마운드만 보면 그의 금테 안경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언제든 마운드에 오르면 타자와 치열한 승부를 펼칠 것처럼 그의 눈도 충혈된 달처럼 강렬해졌다. 그는 후배 선수들이 마운드 위에서 자신처럼 투쟁심이 넘치는 투수가 되길 바랐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하라 다쓰노리 감독이 아직도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더라. 홈런을 맞아도 같은 코스로 공을 집어넣는데 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고 하던데.

아마추어 시절 하라와 경기를 한 기억이 난다. 그와의 대결뿐만 아니라 줄곧 그랬다. 누군가 내 공을 치면 ‘네가 내 공을 쳤어?’ 하면서 그 코스로 다시 공을 던지곤 했다. 네가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으면 네게 기회를 줄 테니까 다시 한번 쳐보라는 의미였다. 만약 상대방이 또 내 공을 치면 ‘OK, 인정한다’했지만 못 치면 ‘거봐, 넌 어쩌다 내 공을 친 것 뿐이야’ 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투구와 나에 대한 자신감이 그만큼 있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럴 때마다 코칭스태프에서 말리지 않았나.

당연히 그랬다. 날 잘 모르는 분은 “아니, 저게 미쳤나” 하시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아이고, 쟤 성격 또 나온다.” “저 녀석 또 시작이다” 하면서 입맛을 다시기 일쑤였다. (웃음)

마지막으로 야구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후배들은 아마도 유니폼을 입었을 때와 벗었을 때의 차이점을 모를 거다. 유니폼을 벗고 났을 때의 인생이 어떤지 아는가? 마음이 쓰라리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에 인생 전부를 바친 그라운드에서 물러나 문을 잠그고 벽에 기댔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 선수는 야구를 사랑한 것이라고.

- 2006년 7월 인터뷰 -


최동원은 '날려라! 홈런왕'에 출연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하이트볼'에서 멘토로 참가할 땐 이미 전신에 암이 퍼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점이 아쉬움이다. 만약 그가 자신의 남은 날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면, 보고 싶던 이들과 가고 싶던 곳을 찾아서 마지막을 차분하게 정리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처럼 외롭게 생을 마감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최동원은 그처럼 조용하게 생의 마지막을 정리했던 것일까.

감독님. 요즘 많이 수척해 보이십니다. 감독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주변에서 내한테 자꾸 묻더라고. "어디 아프냐"고. "암이 간으로 전이됐다는 데 사실이냐"고. 그러면 내가 그래요. "왜 건강한 사람 자꾸 환자로 만드느냐"고 말이지(웃음). 난 아직 건강해요. 행여나 박 기자도 그런 이야기 어디 가서 하지 마세요. 그래도 내가 명색이 '날려라! 홈런왕' 감독인데, 아이들이 나 때문에 동요하면 큰일이에요.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아이들 부모님들이 날 보면 굉장히 좋아한다고. 나 보면서 컸다고 하더라고. 그분들한텐 언제까지나 최동원 이름 석 자로 남아야 하지 않겠어요.

- 2010년 1월 -

KBO 경기 감독관 시절 물끄러미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최동원(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최동원을 마지막으로 본 건 지난 7월이었다. 그는 김성한 전 KIA 감독과의 특별 대담에 환한 얼굴로 등장했다. 하지만, 여느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은 핼쑥했고, 그의 팔은 수액이 끊긴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테이블에 갖가지 음식이 나왔지만, 그는 자신이 준비해온 고구마와 차만을 마셨다.

그러나 대담에선 씩씩한 태도로 김 전 감독과 추억을 주고받았다. 대담이 끝나고 김 전 감독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최동원의 건강을 걱정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동료의 사투가 김 전 감독은 몹시도 마음이 아픈 듯했다. 최동원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 건 그 즈음이었다.

 

감독님. 건강, 괜찮으시지요?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나저나 박 기자 결혼할 때도 못 가보고 미안해요.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아무쪼록 꼭 건강하셔야 합니다. 엔씨소프트 9구단 창단식 때도 오셔야지요. (주 : 최동원은 9구단 창단에 관심이 많았다. 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가 자신의 팬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몹시 기뻐했다.)

가고는 싶은데, 모르겠어. 어떻게 될지. 그나저나 박 기자. 부탁이 하나 있어요.

네, 무슨?

김성한 감독이랑 대담한 거. 그거 기사 나갈 때 가능하면 핼쑥한 사진, 아파 보이는 사진들은 다 빼줘요. 그냥 웃는 사진만 넣어줘.

사진이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나올 때 거울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 최동원 이름 석 자하곤 안 맞더라고. (멋쩍게 웃으며) '날려라! 홈런왕' 아이들 보면 안부 좀 전해줘요. 요즘 그 애들이 눈에 아른거리더라고.


그게 그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차에 올라타 사라지는 그를 보며 <스포츠춘추>는 창원구장에서의 그의 멋진 시구를 기대했다. 하지만, 9월 14일 최동원은 그가 사랑했던 야구와 작별을 고했다.

돌아보면 이 역시 최동원이 옳았다. 최동원은 마지막까지 최동원으로 남길 원했다. 50대의 암환자 최동원이 아니라 프로야구를 호령했던 대투수 최동원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그리고. 최동원의 뜻대로 됐다. 그는 이제 '불멸의 최동원'이 됐다.

만약 우리가 좀 더 최동원의 목소리에 일찍 귀를 기울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좀 더 오래 최동원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는 볼 수 없는 최동원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당신이 옳았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별은 하늘에만 떠있는다고 별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돼줘야 그게 진짜 별이에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 이제 야구계를 위해 나도 뭔가를 하려고 해요. 이젠 그냥 ‘최동원’이란 이름 석 자가 빛나는 별이 아니라, 젊었을 때 나처럼 별을 쫓는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그런 별이 되고 싶어요. 야구가 뭐냐고요? (금테 안경을 고쳐 쓰며) ‘최.동.원’ 이름 석 자지. 야구가 전부였지…."

- 2011년 7월 인터뷰에서 최동원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동희 MBC ESPN 프로야구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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